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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섬 Jun 07. 2022

산나물 처녀를 보다가 다세포 소녀를 떠올렸어

산나물 처녀 (감독 김초희, 2016)



다세포 소녀


누군가 내게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즈음  홍상수 감독의 <우리선희> 그래서   닿았다. 남자들은 저마다의 선희를 정의 내렸지만 영화  선희는  번도 자기 입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설명하지 않은  아니라 설명하지 못했다고 믿는 쪽이다.

서른 세 살, 남자, 마산 출생, 부산 거주, 회사원… 사실 이런 건 범주화 할 수 있는 정보일 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런거야 말로 나를 유추할 수 있는 지표이겠지만 언제나 그 것들은 내 입을 통해 꾸며진다. 어느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괜찮다고. 어차피 이 글도 누가 읽을지 모를 일이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어느때보다도 솔직하게 털어놔볼까 한다.


영화부터 이야기 해볼까. 영화가 내 마음을 얻기란 아주 쉽다. 그저 자기 식대로 막 밀고 나가는 영화를 좋아할 뿐이니까. 그게 개연성이 있건 말건, 현실성이 있건 없건 남 눈치 따위 보지 않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다세포 소녀>를 남몰래 좋아했다. 10년 전, 그 영화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어딘가 낙서를 남기듯 "넘쳐나는 상징들이 마냥 부유하고만 있어 아쉽다"고 한줄평을 남겼던 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유일한 애정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코멘트를 눈 여겨 본 누군가의 제안으로 작은 웹진의 초기 멤버가 되어 영화 리뷰를 몇 편 썼다. 그 덕에 경남의 한 독립잡지 창간 멤버로도 발을 담글 기회가 왔고, 한동안은 글쓰기에만 몰두한 적도 있었다. 틈틈이 같은 학과 친구와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니, 글쓰기와 영화로 가득찬 삶이었다. 창간호를 펴내며 너무 지쳤던건지 문득 꼬박꼬박 월급 받는 삶을 갖고파 별안간 취직을 했고, 두 달만에 별안간 퇴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곤 다시 취직을 하면서 1년만 다녀도 대박이라 생각한 직장생활을 벌써 5년이나 해내고 있다. 취직 전만 하더라도 1년에 영화를 300편 넘게 본 해도 있었는데, 지금은 올해 본 영화를 한손에 다 꼽을 지경이다. 영화에 취미가 있었다고 추억하기조차 낯부끄러운 지금, 나는 또 한 번 별안간 퇴사를 꿈꾸고 있다. 그러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났고, 이어서 <산나물 처녀>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세포 소녀>를 떠올렸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무슨 얘기가 이렇게 별 거 없이 기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듯이 <다세포 소녀>를 다시 떠올린 것처럼, 그동안의 내 글도 살아온 모양새도 돌아보면 그저 흐르는대로였다. 지나고 보니 계획이란 없었다. 무계획의 인간에게 계획이 끼어든 삶이란 언제나 수면과 맞바꾸는 실체의 꿈이다. 하지만 나는 늘 수면이 중요하고, 그럼에도 어쨌든 잘 살아왔다. 계획이든 무계획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마음으로든.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나는 이 대사로 수렴하고 기억한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


내 하루 하루가 그랬다. 20대 이후의 나는 그렇게 요약된다. 꿈이라는 단어는 막연한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지만, 저마다의 꿈은 다 다른 단어이니 꿈이라 뭉뚱그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 꿈이 영화든, 돈이든, 사랑이든, 직업이든 그 대상을 포기하는 건 무해하다. 다만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만이 유해할 뿐이다. 나는 저 대사를 혼자 각색한다. 마음이 시들어 하고 싶은게 달라지면 뭐 어떠냐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마음 드는 만큼만 하면 그만이라고.



산나물 처녀


어쩌면 그 의미를 또 <산나물 처녀>에서 만난다. 미지의 행성에서 온 순심과 땅에 발 붙이고 산나물을 캐는 달래는 짝을 찾는 게 꿈이다. 그리고 그 짝을 심지어 찾는다. 무려 하늘에서 날개옷을 입고 내려온 남자 둘을, 그것도 사슴의 도움으로. 그리고 두 짝은 콩깍지가 벗겨진 후 서로 다른 결말을 맞는데 이쯤에서 좋아하는 책 구절을 하나 인용하고 싶다.


"대개 사랑은 콩깍지가 씐 상태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콩깍지가 벗겨졌는데도 그 사람이 좋은 것이다. 모든 단점을 상쇄 시키는 것, 이해 불가능한 상태가 사랑이다." - 박연준, 장석주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난다, 2015)



짝을 잃고도 태연하게 날개 옷을 빌려 입는 순심의 표정과, 달래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마법 같은 일이요!"라 외치는 순심의 목소리에서 나는 이 영화에 마음을 내어주었다. 사실 '마법 같은 일'이란 임신이 아니라 콩깍지가 벗겨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또 이 영화를 "마법 같은 일이요!"라는 대사로 기억에 남긴다.

내 꿈도 어쩌면 '사랑'이다. 다시 돌이켜보면 늘 모든 결정에는 그게 가장 우선이었으니까. 어떨 땐 그걸 잃을까봐 불안함에 매몰된 적도 있었고, 어떨 땐 변해버린 내 마음에 도리어 내가 상처 받는 일도 있었다. 조금 더 나이든 지금은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의 마음으로 사랑을 대하고, 콩깍지가 벗겨지고도 이어지는 건 "마법 같은 일" 쯤으로 생각하며 연애를 한다. 물론 이게 꼭 사랑에만 국한될 일이랴.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고도 현실 여건에 부딪히다 콩깍지가 벗겨지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계속 할 마음이 생긴다면 그 또한 마법 같은 일이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 시들해진 사랑이든 꺾여버린 꿈이든 흥미를 잃은 일이든, 마음 쓸 필요 없는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 와중에 진짜 "마법 같은 일"이 생긴다면 스스로 축하만 해주자. 순심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시 다세포 소녀


순심의 첫 등장에서 나는 다세포 소녀를 떠올린다. 순심과 달래의 첫 대화에서도 다세포 소녀를 떠올린다. 숲을 뛰어 달려온 사슴에게서도 다세포 소녀를 떠올린다. 사투리 내레이션에서는 "니가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고, 나는 내 길을 가련다." 라는 감독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풍경을 훑거나 응시하는 컷에선 홍상수의 영화도 잠깐 떠올린다. 그러곤 찬실이에게 가는 길목의 김초희 감독을 상상해본다. 또 별안간 내가 떠오른다.

산나물 처녀 없이 찬실이는 존재할 수 있을까. 모든건 인과가 있다고 믿는다. 나를 이루는 내 기억들, 내가 겪은 감정들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만 나를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걸 읽은 분들은 이제 안다. 나는 다세포 소녀가 자라 산나물 처녀가 된 서른 세 살, 남자, 마산 출생, 부산 거주, 회사원… 쯤인 사람이란 걸. 평범함의 틀에 들어가기엔 어딘가 모난 구석이 있어 아구가 안맞을거란 걸. 마음 한 켠 먼지 쌓인 곳엔 남몰래 아직도 영화를 품고 있단 걸. 그리고 나는 믿는다. 어쩌면 모두가 저마다의 평범함 속에 각자의 다세포 소녀를 키워오고 있다고. 계획이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면서, 다만 애는 쓸 뿐이라고.





이 글은 <M 다시보기 1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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