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터 (감독 조나 마코위츠, 2007)
곧 닥쳐올 무더위는 모른 체하자. 5월의 햇볕은 목덜미에 얹힌 엄마 손바닥 같다. 눈부시지만 미지근한 햇볕 아래, 동네 곳곳 피어난 장미가 5월을 유난히 예쁘게 만든다. 5월이 가정의 달인 건 가족과 관련된 날이 많기 때문일 테지만,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달이 기꺼이 가정의 달이라는 별칭으로 여태껏 불리는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의 고도화와 삶의 다양성은 비례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발전된 사회일수록 삶의 모양은 다양하고, 다양한 삶을 받아들이는 사회일수록 발전은 빠르다. 가족에 대한 애정은 모두가 비슷한 모습일 테지만 가족의 형태를 규정하는 시각은 우리 사회도 어느새 많이 다양해졌다. "1인 가구도 가족"이라는 말이 흔해졌고, 기업들은 "반려동물도 가족"이라며 가족 수당을 챙기기에 이르렀다. '내 가족'에 포함하는 대상이 나 자신일 수도, 혈연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 동물일 수도 있는 시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집을 떠나 제각기 흩어져 살아도 마음은 한데 모이듯, 가족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가 된다.
남성 퀴어 주제로 한 가족극
전통적 혈연·성역할서 벗어난
삼촌과 남자친구·조카의 결합
서로에게 '심리적 안식처' 돼
2007년 작 <셸터>는 퀴어 영화임에도 가족 이야기를 앞세운다. 그것도 혈연으로 맺어진 전통적인 가족상이다. 주인공 소년 '잭'과 그의 남자친구 '션'이 이 영화를 퀴어에 속하게 하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완성시키는 건 잭의 5살 조카 '코디'다. 영화는 잭과 코디를 중심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역설한다.
셸터(shelter)라는 단어는 주거지 혹은 안식처, 보호처를 의미한다. 이는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를 잘 비유한 단어이면서, 인물 관계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작은 해변 마을, 잭은 아버지와 누나와 조카로 이뤄진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한다. 자신의 사생활 때문에 번번이 조카를 맡기는 누나의 셸터이자 조카의 셸터다. 누군가의 셸터로 사는 것이 잭의 삶을 완전히 잠식해갈 무렵, 션이 나타나 평생 누군가의 셸터였던 잭에게 셸터가 되어주고 잭이 보살피는 어린 조카 코디에게도 기꺼이 셸터가 되어준다. 그러면서 혈연 가족으로 시작한 영화는 요즘의 가족 개념으로 이어진다. 혈연에 근거한 결합이 아닌,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타인들의 결합 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가족 개념은 조카를 사이에 두고 명확히 대립하며 결말에 이른다.
코디와 코디 엄마의 관계는 대사 한마디로 수렴된다. "귀찮게 하지 말고 TV나 봐." 마지막까지 그녀는 남자친구 '앨런'을 따라 돈을 벌러 떠나겠다며 잭에게 코디를 맡기고, 같이 따라가면 안 되냐는 코디의 물음에는 대답 대신 앨런의 눈치만 살피기 급급하다. 잭은 코디를 성가시게 여기며 욕설까지 일삼는 앨런과 몸싸움까지 치달은 후 자신과 션, 코디로 가족을 이뤄 살기로 결정한다.
잭의 누나와 그녀의 남자친구 앨런, 동성커플 잭과 션, 그 사이에 있는 5살 코디. 어린 코디는 어느 커플과 함께해야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까. 가족의 요건은 성별과 연령과 생물학적 관계가 아니라, 공유된 생활과 이어진 마음으로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사람은 누구나 물리적인 안식처와 별개로 심리적인 안식처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내 안식처로 삼기도 하고, 내가 누군가의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내 가족에게 충분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는지 되짚어 본다. '그래도 가족이니까'는 이제 옛말이다. 가족은 날 때부터 완성형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의 꾸준한 노력과 관심과 애정으로 '가꾸는' 것임을 마음 한구석에 새기며, 모두에게 더욱 돈독하고 따뜻한 가정의 달이 되기를 바라본다.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