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만 9세가 되는 우리 집 어린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학교에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정규 교과’에 해당하는 과목별/학년별 학습을 하지 않는다. 아침 7시 20분에 일어나 밤 9시 40분 경 잠에 들 때까지, 아이는 규칙적인 일상을 살며 자신의 몸과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사에 따라 이것저것을 배우고, 익히고, 연습하며 산다.
아이는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녔다. 학습/습득 속도나 수준도, 또래관계도, 교사와의 관계도 썩 괜찮았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인 우리 눈에, 한국과는 조금 다를 줄 알았던 미국에서도 ‘학교교육’이란 별 수 없구나 싶은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만 5세 아이들이 학교 건물에 들어 앉아 종소리에 맞춰 기계처럼 일과를 처리해야 했고, 수업 중 화장실에 가려면 색색깔 플라스틱 컵을 바로 놨다 뒤집어 놨다 하며 선생님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그런 규칙을 잘 따르지 못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문제아’로 취급됐다.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릴 때는 화면에 보이는 순서 그대로 따라 그려야 했고, 색칠을 할 때는 선 바깥으로 튀어 나가지 않게 칠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교실 뒤편에는 색깔로 구분해놓은 차트 위에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집게가 꽂혀 하루 온 종일 오르락 내리락 하게 돼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학교가 파할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자신이 색깔 차트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보고 자신의 하루를 평가하며 스스로 우월감을 갖거나 열등감에 빠졌다.
1년간의 미국 유치원 생활은, ‘집합교육’으로서의 학교교육에 심각한 회의를 품게 했다. 하루 5-6시간씩 놀이터에 나가 놀던 아이에게 바깥 놀이 시간은 점심시간 전후로 겨우 2-30분씩 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수업 시간’은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이런 식으로 분절적이고 단편적인 지식 조각을 주워 담는 시간에 불과했으며, 아이는 교사로부터 인정 받으려는 욕구와 동료와 경쟁하려는 욕구를 빠르게 습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길들여지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13년에 달하는 전체 학교교육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하는 것이어야 했다. 유치원 입학식에 학교장이 학부모에게 인사말을 하면서 “여러분의 자녀는 2031년 졸업생이 될 겁니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 건 우리 부부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암튼 우리에겐 그 말이 참, 뭐랄까. 잔혹하게 들렸다. 물론 미국은 한국에 비해 중퇴율이 높기 때문에 더 그런 걸 강조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한 번 발을 들였으면 같은 해에 같이 졸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 낙오자로 살게 될 거라는 으름장처럼 들렸달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아이를 학교에 묶어두고 싶지 않았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착실하게 12년의 공교육을 마치고 대학, 대학원까지 거쳐 ‘고학력자’가 되었음에도, 그 숨막혔던 시절을 아이가 똑같이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을 하며 인생을 꾸려나가고 싶은지 스스로 마음껏 생각해보고, 나와 세상의 관계를 탐색하며, 나만의 관점이 있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다. 무엇보다도, 남다른 몸을 지니고 태어난, 여러 면에서 섬세하고 민감한 이 아이를 ‘정글’ 같은 경쟁의 진흙탕 속에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귀국을 앞둔 상황에서, 한국의 학교가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아는 우리로서는 아이를 한국의 학교 시스템에 들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언스쿨링’은, “저만의 자유와 시간을 주며, 중요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읽고 생각하도록”(p.58) 하기 위한 우리만의 교육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아이에겐 존 테일러 개토가 말한 ‘(학교교육에 따른) 병리현상’과는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어른들의 세계”, 즉 현실 세계에 관심이 많고,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묻고 따지길 즐기며, 스스로 선택한 일을 몇 십분에서 한 두시간 쭉 이어 하면서 완결짓기를 좋아한다. 자기 자신의 과거와 미래는 물론, 우리 사회의 과거와 미래가 나와 우리의 현재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줄 것인지 생각해보거나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을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일상의 생활을 돌볼 줄 안다. 감자를 깎고, 설거지를 하고, 작은 생명을 돌보며, 스스로를 아끼고 매일을 즐기며 산다.
개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즉각 아이들에게 독립된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스스로의 앎을 얻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아이들을 진짜 세상과 접할 수 있게 해서 자신의 시간을 추상화된 관념이 아닌 진짜 일에 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위기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합니다”(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