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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곡동 서작가 Jul 25. 2022

열악한 일터를 용인하지 않는 것

<김용균, 김용균들: 싸울 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타닥, 탁.

아이는 아침에 우리 세 식구 중 가장 먼저 일어나 화장실 불을 켜고 들어가 씻는다. 무더운 여름 밤, 새벽이 깊어질 때까지 선풍기를 틀어 놓지만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말끔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고 싶어한다. 그러고는 곧 나와서 헤어 드라이어를 전기 콘센트에 꽂고 윙- 하고 머리를 말린다. 


아직 130cm도 채 안 되는 열 살짜리 아이마저도 너무나도 손쉽게 켜고 끄고, 꽂고, 빼며 사용하는 전기. 그 전기를 만들어내느라 죽어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이는 알지 못한다. 실은 나도 알지 못했다. 김용균이 죽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살면서 대단한 정전 사태를 겪어본 적도 거의 없어서, 전기는 내게 그냥 당연하게 항상 거기 있는 무엇이었다. 그 뒤에 사람의 노동이, 그것도 무지막지한 노동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노동이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해본 적이 없다.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또는 기후위기와 관련 지어 생각해본 적은 많아도 전기 생산 뒤의 노동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은 그래서 나는 김용균이 죽었을 때에도, 그가 왜 ‘컨베이어 벨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석탄을 옮기는 거대한 장치들, 그 사이 사이에 몸을 구겨 넣어 숯덩이를 뒤집어 쓴 채 기계를 점검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석탄을 삽으로 퍼서 다시 컨베이어 벨트에 옮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정말이지 몰랐다. 그 까만 먼지와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곳은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이었다.


타닥, 탁.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로, 나는 불을 켜고 끄기 위해 스위치를 켜고 끄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시신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 용균 씨의 발이 점검구에 걸렸다. ‘탁탁’ 발이 걸리며 내는 소리에 인구 씨의 마음이 ‘턱’하고 내려앉았다고 했다”(39) 라는 대목을 읽은 후 부터다. 그의 발소리, 그 ‘탁탁’ 하는 소리는 마치 내게 ‘정말 계속 이렇게 살 거냐?’고 묻는 소리 같고, ‘이렇게 또 잠깐 신경 쓰다가 잊고 살 거지?’ 하고 묻는 소리 같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소리에 매번 그런 말들이 웅성웅성, 머릿속을 떠다닌다. 


“사회가 열악한 일터를 계속 용인한다면 열악한 일터는 어디에나 있을 거다. 그리고 누군가는 거기서 일하게 된다.”(246) 


‘계속 용인하지 않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안전한 작업장을 만들어가는 것, 밥 때, 잠 때 놓쳐가며 열 몇 시간씩 연속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것, 점검이 필요할 때는 기계를 잠시 멈출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걸 요구하는 건, 산재피해자나 유가족들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동료 시민들이어야 한다. 직장 동료를, 자식을 잃은, 그래서 ‘싸우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아니 ‘싸울 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그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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