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를 읽고 보내는 연대의 다짐
고3 시기, 뜻대로 나오지 않는 모의고사 점수를 받아 들고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을 다잡기 어려운 날이면 다이어리 맨 끝장을 펼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했다. 일종의 ‘버킷 리스트’였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새벽 신문배달에 나섰던 것도, 대학엘 가자마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으로 첫사랑이 있는 어느 캠퍼스를 찾았던 것도, 그 목록에 들어 있던 일을 하나 하나 해치우기 위해서였다. 불안을 잠재우려 써내려간 목록을 하나씩 지우는 일은 때로는 강박으로, 때로는 또다른 불안으로 이어졌다. ‘걷기’ 역시 시작은 그러했다.
이래저래 좌절하던 시절이었다. 대학 생활, 전공 공부가 상상하던 것과 많이 달라 괴로웠고, 집안의 불화가 끊이지 않아 마음이 아팠고, 연애 상대가 내 자존감을 한없이 갉아먹는데도 그의 손을 내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답을 찾고 싶은데 뾰족한 수가 없어 헤매던 그 해 여름, 나는 고 3때 적어두었던 버킷리스트에서 아직 해치우지 못한 그것을 하러 떠났다. 20일에 걸친 국토대장정이었다. 묵묵히 걸으며 나를, 내가 처한 상황을, 나도 모르겠는 내 마음을 한 발짝 떨어져 들여다 보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걷기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발과 다리, 어깨는 끔찍하게 아팠고, 길은 도망가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하게 이어졌다. 그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완주해야 한다는 마음이 수시로 교차했고, 그런 내 마음이 불안하고 못마땅했다. 여정의 중반부를 넘어서니 그제서야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발끝 마디마디 전해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걷는 동안, 내 몸이 보내오는 신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보다는 오히려 내 시선이 머무는 곳, 내 발이 닿는 곳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에 마음이 갔다. 뜨겁게 끓는 아스팔트를 보며 숨 막혀 하는 땅을 상상했고, 땡볕 국도를 달리는 트럭이 밀어내놓고 가는 한줄기 바람에 고마워했다. 함께 걷는 이가 내뱉는 작은 신음과 한숨 소리에 귀 기울였고, 지쳐 포기하려는 내게 손 내미는 누군가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때 알았다. 걷는 일은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삶과 세상의 일에 가 닿기 위한 여정이라는 것을.
<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는 엄마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홀로 히말라야를 오르기 위해 떠난 ‘엄마 경력 10년’의 한 여성이 시선이 닿는 곳, 발길이 닿는 곳에 마음을 주며 연대한 기록이다. 어린 시절 산촌에서 자랐다는, “바다는 답답하고 산은 시원해서” 산을 좋아한다는 작가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답답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밖으로 나가 걸었다. 알만큼 아는 사이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남편 카드’로 편히 살아 좋겠다는 이야기를 건네 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전업주부의 삶에서 유일하게 숨통을 틔워주는 행위가 ‘걷기’였다. 하지만 아침 7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을 하느라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며 종종걸음치던 일상이 이어지던 때가, 그에게도 있었다. 어느 겨울, 조금만 더 자면 안 되느냐는 만 세 살 아이의 자그마한 물음 앞에 와르르, 무너지기 전까지 말이다.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온전히 아이 곁을 지키는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로서 부딪히는 세상은 불안하고 위험하며 부조리한 일 투성이었다. 아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인지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 유아차로 넘기 힘든 진입로와 각종 출입문들, 기저귀 갈 곳을 찾을 수 없어 동동거리게 만드는 건물들, 돌봄노동을 천시하고 비하하는 사회. 그런 것들을 마주하며 작가는 “사회의 약한 곳을 들여다보려는 시선”을 갖게 됐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기 위해 택한 히말라야 여정에서도 함께 걸어주는 여성 포터들의 삶과 일에 대해 생각하고, 포터의 눈에서 한동안 잊고 지낸 옛 친구의 얼굴을 기억해 낸 것은. 그곳까지 가서도 ‘집밥’과 ‘보양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한국인 여행객들을 보며 분개하고, 유독 한국 상표가 찍힌 쓰레기가 많이 보이는 히말라야에서 기후위기를 생각한 것도.
엄습해오는 고산증세와 혹독한 추위 앞에서, 작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최선은 어디까지여야 할까?” 그리고 답한다. 결과가 다를 뿐,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는 선택을 했고, 그렇게 스스로 체념하고 포기하는 나날 속에서 잠 못 이루던 그에게 운명처럼 나타난 다른 ‘엄마들’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소중했다. 만 세 살을 갓 넘긴 어느 겨울 ‘조금만 더 자면 안 되냐’고 묻던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의 시선으로 본 한국 사회는 오히려 더 위험하고, 더 불안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품 안의 아이로부터 잠시 고개를 돌려 내다 본 세상에는, 아이를 잃고 투사가 된 엄마들이 넘쳐났다.
지난 몇 년간, 작가는 다른 ‘엄마들’을 만나 매일같이 늦도록 글을 쓰고, 토론회에 나가 발표를 하고, 거리로 나가 말했다. 히말라야에서 내려와 다시 ‘엄마’라는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제 그를 부르는 ‘엄마’라는 호칭 앞에는 ‘정치하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누구보다도 열심을 내어 늦은 밤 성명서와 논평을 쓰고, 냉철한 분석으로 토론을 이어가던 사람이었으면서도, 작가는 그 시간 내내 ‘최선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 같다. 단체로서는 전에 없던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지만 나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고, 당장 내 몸과 내 아이가 편치 않고, 세상은 계속해서 위험하고 불안한 일 투성이라면, 누군들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히말라야로 다시 한 번 떠나기 전날, 작가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히말라야의 한파를 하루 먼저 맞이했다. 200여 건의 민생 법안을 쌓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느라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를 선언한 야당의 행태에 분노한 엄마들이 ‘필리버스킹’을 하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칼바람이 불어 춥고 미세먼지가 극심해 차마 아이를 데리고 나설 수 없었던 나는 그 날, 영상으로 그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미안했고, 그는 앞으로 며칠이나 더 국회 앞에 서야 할지 모르는 동료 활동가들에게 미안했다.
두 번째 히말라야 여정에서 돌아오는 길, 그는 단체 활동에 대한 양가 감정과 스스로에 대한 확신없음을 덜어내고 다짐한다. “나의 노력 역시 변화를 이끄는 데 뭐라도 기여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기꺼이 내 몫을 해가겠다”고. 책 끄트머리를 향해 달려가는 지점, 독자로서 나는 그가 그렇게 결론내려주어 고마웠고, 다행이라 여겼다. ‘계속 걸어가는 사람’이기를 희망한다는 그가 부디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걸어주었으면 좋겠다.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리해야 한다. 혼자서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함께 걸을 사람을 찾아 많은 시간 연대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그렇게 걸으면 된다.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걸어준, 함께 걸어주고 있는 그에게 깊은 감사와 우정, 그리고 연대의 다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