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와 불평등>을 읽고
언젠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찾아 읽다가 깊은 의문에 빠진 일이 있다. 제 31조 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말에서 ‘능력에 따라’라는 말이 유독 눈에 거슬렸다. 당시 나는 장차 장애로 이어질지도 모를 희소질환을 안고 태어난 만 네 살 아이의 엄마로서, 처음으로 장애와 비장애, 즉 어떤 형태로든 능력을 상실했거나 애초부터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갑고 단단한 벽에 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 내 눈에, 헌법 31조에 등장하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라는 말은 머리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고 느꼈고,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그 한 줄의 문구는 내게 정체모를 상처로 다가왔다.
헌법 제 31조에서 말하는 ‘능력’이란 무엇일까
당시 내가 가졌던 의문과 의심이 실제로 타당한 의심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알았다. 교육공동체벗에서 펴낸 <능력주의와 불평등>에 실린 두 번째 글, “시험/평가체제 속 인간과 교육받을 권리”에서 이경숙은 1994년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소개한다. 그 판례 속에서 헌법 제 31조 1항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에 상응한 적절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낮거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상응한’ 교육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장애인 교육 실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2017년 장애인실태조사는 전체 장애인 중 54.4%가 중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갖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었고, 장애인의 교육권은 코로나 상황에서 더욱 심각하게 소외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능력에 따른 교육이란 능력을 이유로 사회불평등을 온존시키는 장치가 되기 십상(p. 51)”이라는 구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란 능력을 넘어 모두가 충분히 맘껏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교육을 받는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 개인의 능력은 교육권을 더 잘 누리도록 돕기 위해 살펴봐야 할 기초 조건이지 교육권을 차별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빈부, 남녀, 지역과 마찬가지로 능력 역시
차별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p.58)
그런데 우리 공교육 시스템은 철저히 이 반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교가 ‘낙인 발행소’역할을 한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낙인찍기’의 중심에는 평가가 있다. 평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평가를 제대로, 공들여 해야 하는 데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도 ‘평가의 두려움’을 알아야 한다는 저자의 일갈이 아프게 박혔다. 아이라는 존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성장하는 인간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지. 그런 존재들을 두고 단 하루의 평가에 학창 시절 모두를, 그 후의 인생을 몽땅 걸게 하는 우리는 얼마나 잔혹한가.
경쟁, 그리고 자기혐오
그렇게 ‘능력을 뽐내는’ 경쟁의 무대에서 탈락한 이들, 그리고 애초에 그 경쟁의 장에 끼어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능력 없는’ 사람이 되어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되곤 한다.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공평하다 생각한 것이 결국 능력주의의 강화를 초래했음을 지적한 채효정의 글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에 치열하게 문제제기했던 선배 세대 학벌 타파 운동의 맥락과 그 역사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했다.
‘스펙’이라는 말이 하나의 거대한 키워드로 떠오르던 시기에 대학을 졸업한 내게는 스펙 경쟁을 하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좌절하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없는 돈을 퍼부어서 해내야 하는 경쟁의 판에 끌려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나의 ‘능력 없음’을 방어하기 위한 핑계는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능력을 채굴하는 자기계발자’(p. 119)가 되기를 거부하는 나는 혹시 나의 무능력을 들킬 것이 두려워 지레 포기해버린 건 아닐까, 회의와 의심을 거듭했다.
이렇게 능력주의는 자기혐오를 낳는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서로에게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화살을 겨누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다. ‘시험으로 평가할 수 없는 진정한 능력’ 운운하며 등장한 역량평가니 학종 비교과니 하는 신개념의 평가 역시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수긍하고 정당화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능력주의를, 정확히는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는 우리의 교육체제를 더는 유지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렇다 할 능력이 없어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35년을 매일같이 쇳덩이를 자르고 이어 물건을 만들어 팔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사는 예순 다섯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애비가 능력이 없어서 미안하다.”라는 그 자조 섞인 서글픈 목소리가 책을 읽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세상이 말하는, 당신이 생각하는 ‘아비의 능력’이란 무엇인지, 당신이 정말 ‘능력 없는 아비’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날들을 지나 나는 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 아이가 이렇다 할 능력이 없어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굳이 능력을 개발해 평가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사람 대접 받으며 내적 만족감을 찾고, 어떤 식으로든 남 해칠 일 없이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사고하고, 기여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을 권한다. 능력주의를 벗어난 사회는 우리 모두의 삶에 이로울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