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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곡동 서작가 Oct 06. 2021

도서관이라는 공간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김성우x엄기호



미국 이주 초기, 구직 허가증 같은 것을 의미하는 워크퍼밋(work permit)이 나오자마자 옆동네 도서관 사서보조업무 시급직 공고가 나와 지원한 적이 있다. 관련 경력이라곤 한국에서 책문화/도서관문화운동 하던 시민단체에서 자원활동한 것 밖엔 없었지만, 영문학 전공자라 기본 인문 소양은 있으리라 본 것인지, 자원활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 탓인지 아무튼 1차 서류 통과가 되어 2차 면접에 불려갔다. 


그런데 그 면접 자리에서 받은 질문들은 당시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한 것들이어서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특히 이런 질문. “근처 학교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받은 과학 과제를 하는 데 도움을 청하러 몰려왔다. 뭘 어떻게 도와줄래?” 한국에서 학교 숙제와 관련해 도움을 받으러 도서관에 간 경험이 1도 없는 나로서는 그게 무슨 말인지부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다 결국 탈락해서 일할 기회를 얻진 못했지만, 그곳에 사는 8년이라는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드나든 공공장소가 도서관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그곳에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는 곳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도서관 사서들 역시 단순히 책을 찾아주는 사람 이상이라는 것을. 


아이를 낳기 전엔 자원활동가로, 아이를 낳은 후엔 이용자로, 매달 서너 차례씩 공공도서관엘 들렀다. 먼지 폴폴 나는 지하서고에서 오래된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자원활동을 하면서, 동네 터줏대감에 해당하는 어느 노부부를 만났다. 한 사람은 철학 전공자로 그 동네 대학에서 오랫동안 강의하다 퇴임한 사람이었고, 그의 배우자는 그 동네의 야생조류탐사/보호 단체의 활동가로 오랫동안 일해온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동서양 철학자의 이름과 철학을, 한 사람은 새와 꽃, 풀과 나무의 이름과 특징을 줄줄 꿰고 있다 보니 오며가며 도서관 이용자들이나 사서들과 각자의 ‘전문분야’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도서관 지하서고의 모습. 매주 쏟아져 들어오는 기증도서들을 저렇게 박스에 담아 분류하는 일을 했다. (사진: https://uwlafayette.org/volunteer



그런가 하면, 이제 막 기고, 걷고, 말하기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드나드는 도서관은 또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영유아를 데리고 오는 이용자를 위해 열리는 프로그램은 하나같이 ‘퀭한 눈’을 하고 아이 손에 이끌려 다니는 엄마/아빠들이 서로 눈 마주치며 피식, 웃을 수 있게 했다.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들을 위해 다달이 주제를 잡아 여는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학교 밖 배움’을 가능하게 했고, 평일 오전 한가한 시간대에 특수교사들과 함께 온 발달장애 학생들이 마음껏 소리내고 움직이며 책을 볼 수 있게 했다. 또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남자가 자신은 타지에서 왔는데, 시카고까지 가려고 길을 나섰지만 돈도 떨어지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라서 이 동네에 들어오게 됐다며 사서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실 도서관 이용과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고, 그 남자의 이야기가 정말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기에 도서관에서 대처하긴 어려운 일일 텐데도, 사서는 침착하게 그 남자의 요청에 응대했다. 동네 어디에 가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시카고까지 가는 버스 노선이 어떻게 되는지를 안내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배움의 공공성’, ‘공정성을 넘어 모두의 것이 되는 리터러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을 읽는데 그 때의 경험들이 떠올랐다. 귀국 후 찾은 여러 공공도서관은, 분명 10여 년 전보다 많이 좋아졌겠지만 아직 그 ‘배움의 공공성’이라는 가치에 다다르려면 멀었구나, 싶게 만드는 때가 많다. 아이들이 주로 찾는 공간에마저 ‘조용히 하세요’ ‘소리 내어 읽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전체적으로 그저 책’만’ 찾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해서다. 


물론 예전엔 도서관이라는 곳이 책 읽는 공간이 아니라 ‘공부하는 독서실’ 기능을 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도서관은 분명 진일보했다. 또, 도서관에서 여는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특정 시간대, 특정 장소에서 ‘프로그램화’된 맥락에서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 외의 시간, 그 외의 장소에서는 ‘조용히 책만 읽다 가야 하는’ 도서관이라면 그곳에서 ‘사회의 리터러시 역량’이 길러질 것 같지는 않다. 누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도서관을 편하게, 쉽게 드나들며 개개인이 오랫동안 탐구하는 분야를 만들 수 있게 하고, 그와 같은 탐구를 지원하며, 또 각자의 그 ‘전문 분야’를 도서관 안팎에서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도서관이 가져가야 할 ‘공공성’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빌려다 읽게 해 준 우리 동네 도서관 '뜰안에 작은나무 도서관'과 그 곳을 지켜온 사람들이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이곳은 '추천도서'가 아닌 '이용자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하도록 독려하고, 지역의 많은 자원과 사람을 연결하며, 이용자와 동네 사람들을 위해 언제든지 공간과 시간을 내어주는 곳이다. 사회의 리터러시란, 도보 가능한 거리에 이런 철학과 운영방침을 가진 도서관이 있을 때 길러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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