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인풍요 너머기억 속에여전히 남은 갈망에 대해
일상을 시작하는 매일 아침 익숙한 해안도로가 포함된 출근길을 달리고 있다. 신호등 지시에 따라 얌전히 앞차와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브레이크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앞차도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한쪽 후미등이 들어오지 않은 구형 검은색 그랜저이다. 도로에는 다양한 연식의 그랜저가 보이지만 앞의 차는 조금 더 연식이 오래된 이른바 '각진' 형상을 가진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랜저는 1986년도에 처음 판매를 시작한 현대자동차의 고급 세단 자동차이다. 2021년 현재 35년째 이어져 6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이 모델은 'Grandeur; 원대함, 고상함, 위엄'등의 뜻을 가진 이름으로 마이카 붐이 일기 시작 직전 이 땅의 권력과 명망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역사가 있다. 한 때 어느 광고에서 '요즘 어때? 에 대답으로 '나 그랜저 타!'라는 말로 대표되는 이 땅의 성공과 부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사용될 정도로 그 이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무렵에 지금의 직장에서는 일반직원이 출입 차량으로 등록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제도였지만 자동차로 개인의 격(格)을 나누는 일이 보다 노골적인 시대이었기에 임원용 차량으로 사용하는 모델이라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금지가 쉽게 용인되었던 시대였다.
세월이 흘러 반발심 혹은 그런 이미지를 동경한 결과인지 검은색 그랜저가 회사 공장 주차장 곳곳에 자주 눈에 띄었다. 이젠 개인 소득도 늘고 권위적인 것에 대한 당연한 사회적 저항이 생기면서 자신도 무언가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거나 예전에 동경했던 이미지를 표현하는 의식이 저변에 있을 것이라는 성급한 추측을 한다. 그렇게 그랜저는 더 이상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인식되지 않는 이른바 중산층을 위한 차가 되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그랜저는 청년 시절 아직 세상의 부와 권위를 부러워하고 그것에 대한 동경심으로 가득 찬 시기의 이상체(理想體)로 각인되어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늙고 쇠약해진 부친을 모시고 시 외곽에 모셨던 돌아가신 할머니의 공원묘원을 찾기 위해 만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는 이미 노인이 비집고 들어서기는 힘들어 낡은 택시를 타고 공원묘원 좁은 도로에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그랜저가 우리 곁을 빠르게 지나치던 모습을 왠지 모를 무력감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아직도 난 내 앞에 이렇게 '각지고 검은색 그랜저' 뒤를 보게 될 때마다 알 수 없는 위축감 혹은 부러움?을 느낀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나는 그랜저를 만든 회사에서 프래그십 차량으로 내세우는 검은색 법인차량을 운전하고 있으면서.
일본의 어느 코미디언이며 유명한 연예인이 누구도 부러워할 최고급 스포츠카를 현금으로 구입한 후 그 차를 판매사원에게 몰아보라고 하며 정작 자신은 오래된 중고차를 몰면서 그 뒷모습을 즐겼다는 믿기 힘든 회고담을 읽었는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산 혼다 어코드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랜저의 기억과 중첩된다. 역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주간 미국 연수기회가 있었다. 국내선조차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제선을 타고 도착한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미리 약속된 현지 한국인 에이전트와 만나 그의 검은색 혼다 어코드를 얻어 타고 두 시간 거리의 낯 선 도시로 이동하는 힘든 일정이었다. 처음 경험하는 환경에 어리둥절하는 내게 그는 자신의 차가 미국 사람이 가장 보편적으로 타는 중형차라고 설명하였다. 현재 10세대까지 모델이 나오고 있는 그때의 어코드는 지금보다 각진 형태의 전형적인 세단형으로 그랜저의 이미지와 겹쳐 보였다. 다음날 한국에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현지 연수 대상 회사의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통해 인근 우체국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중년의 백인 여성 직원이 갈색 혼다 어코드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는 당시 신생회사의 중간 관리자 정도였는데 서툰 대화중 난 무슨 차를 타느냐는 질문에, 나는 당연한 듯 버스로 출퇴근한다는 대답을 하였다. 자신은 버스를 거의 타 본 적이 없어서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는 그의 반응에 당시 한국과 미국과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미국의 평범한 직장인이 개인용으로 소유할 수 있는 급의 차가 7,000km 떨어진 한국에서는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대비되는 것이 당시에는 실감 나지 않았다. 체류하던 기간 내내 친절하게 배려해준 출퇴근 동승 시에 나도 이런 차를 탈 수 있을까 하는 당찮은? 상상을 했던 기억이 있다.
2021년 현재 그랜저와 어코드는 고유의 각진 모습이 지속적으로 변경되어 좀 더 콤팩트 해진 유선형의 모습으로 아직 거리를 달리고 있다. 더 이상 타인의 주목 대상이 아닌 이른바 ‘하차감’ 없는 평범한 중산층의 이미지를 풍기는 일상의 자동차가 되었다. 청년시절 꿈꾸던 이상적인 경제적 풍요함이 어느새 그 이상의 것으로 실현되어 있지만, 여전히 그랜저와 어코드는 여전히 쉽게 설명키 어려운 부러움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