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재발견
영국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사망한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그 해에 아버지는 10여 년 간의 병치례 후 돌아가셨다. 1926년 생이시니 해방 전까지 일본 제국 식민지하에서 태어나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가난, 무지, 수탈 그리고 대동아 전쟁이 휘몰아친 과정 중에 피할 수 없었던 징용으로 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어렴풋이 자신이 배치되었던 지역이 동남아 어느 지역 정도라고 기억하고, 힘든 징용 군의 삶을 살았다고 그렇게 어린 자녀들에게 얘기하곤 하셨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수년 전에 받았던 위암 수술 이후에 암세포가 뇌종양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기억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자신이 겪었던 말할 수 없었던 공포와 두려움이 제어되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모습으로 가족들에게 나타났을 때의 안타까움과 놀라움은 잊을 수 없다.
기억 속에 꼭꼭 감춰둔 잊을 수 없었던 극한 상황이 현실로 인식되어 눈앞에 있는 현재의 가족들이 뒤섞여 꼭 지켜내야 만 대상을 향한 연민과 두려움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기억 속에만 실재하는 가상의 두려움과 고통, 인내 등을 약해진 육신을 통해 현실로 연결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상 침대 곁으로 다가간 내가 자신이 아끼는 큰 아들임을 인지하였지만, 이미 자신이 경험한 대동아 전쟁의 한 복판에 적군의 포위 속에 있는 당신은 연신, '쉿, 조용히 해라, 저들이 주변에 있어..', 긴박한 그의 절규와 같은 속삭임이 병실 내에서 조용히 울려나갔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부동의 자세로 이 긴박한 상황이 지나가기를 숨죽이고 경직되어 있었다. 어떠한 상황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생각 깊숙이 숨어 있던 두려움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평소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처절했던 생존의 기억과 상처를 아주 조금 옅보았던 순간이었다. 오랜 세월 난 그가 내게 일상에서 보여준 표면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그를 추정하고 해석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 기준으로 볼 때 어이없고 때로는 불합리함으로 가득 찬 고집 센 노인으로 여기기만 했다. 상대적으로 일상에서 소통이 많았고, 아버지의 폭력적인 상황에서 늘 전전긍긍하시던 나약해 보이던 모습이 더 크게 각인되었던 어머니는 연민 가득한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나 나 자신이 그때의 노년의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가면서 그가 보였던 외형의 모습과 내면의 실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내 기억 속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실체 없는 피상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였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몇 가지 내 기억 속에 파편화되어 남아있는 그의 또 다른 삶의 흔적을 연결해본다. 해방 이후에 다시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아직 청년기를 지나고 있는 아버지는 5남 5녀의 대가족의 일원이었기에 다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번째로 군인이 되어야 했다. 국가가 일본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지만 얼마간의 배급이 남은 가족에게 제공될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그는 또 다른 전선에서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나섰다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어린 시절 책상 설합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빛바랜 누런 훈장? 과 색 바랜 전투복을 입고 함께 찍은 동료와의 사진 몇 장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그 전쟁에서도 용케 살아남았지만 자신이 겪어내야만 했던 가혹한 두 번의 전쟁과 살아남아야만 했던 일상의 삶을 견디기 위해 치렀을 무질서와 방종의 흔적을 지닌 채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게 어떤 분이었을 까? 자기표현이 어렵고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의 고난으로 인해 분노조절이 곤란하였던 참으로 힘든 삶을 사셨던 분 아니었을까? 돌아가신 지 십 수년이 지나가지만 그분의 부재에 애달파하지 않고 일상을 아무 문제없이 지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아버지의 기억은 늘 가물거린다. 오래전 은행계좌를 개설키 위해 열어 본 인감도장을 보면서 그분이 자신이 아끼던 상아도장을 어느 날이던가 도장포에서 내 것으로 바꾸어 새겨오신 날, 나는 그저 무덤덤하게 그것을 무심히 건네받았다. 자신에게 가치 있는 몇 안 되는 것을 아낌없이 내게 건네준 그 물건이 아내의 잡다한 보관함 속에 잠자고 있다가 다시 발견되었다. 나도 아버지가 되어 내 아들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내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정성껏, 그렇지만 애써 담담한 척 건넸던 얼마 전의 기억을 생각해 냈다. 그의 생애 후반 무렵 오랬만에 지방근무 중 올라온 날 내 헤어진 구두 뒤축을 발견하고 내색 없이 투박한 솜씨로 수선하여 현관 앞에 놓아둔 일들은 그에 대한 얼마 안 되는 기억 조각 중 하나이다.
장황하게 그 시대를 살았던 윗 세대들이 살았던 다소 일반화된 사연을 가진 아버지의 이력을 소환해내는 이유는 그런 삶의 배경을 가진 아버지가 감추었던 내면의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전쟁 후 베이비붐 시기에 태어난 나와 형제들의 성장기에 보았던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 행동 등의 어렴풋이 관련되었을 것이다. 특히 예측 불가능했던 그의 돌발적인 언어적, 물리적 폭력은 아마도 자신의 헌신적인 삶을 이해하지 않는 원(原) 가정에 대한 원망, 청년기에 꿈꾸던 삶과는 다른 시대적 현실과의 괴리, 그런 상황으로 제대로 갖추어진 배경 없이 세상 경쟁에서 뒤 처진 노년의 삶을 견디지 못하여 분열된 행동으로 분출했을 것이다. 나의 성장기에 느낀 아버지에 대한 분노 가득한 감정의 확신은 어찌 보면 그런 왜곡된 단편만을 가지고 키워온 불완전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판단과 해석도 온전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가 그래서 요즘 자주 보고 싶다. 나의 오해, 왜곡, 원망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그때의 그를 위로하고 싶다. 힘들고 무섭고 당황스러운 시간을 그렇게 오랜 세월 견디고 살았던 당신에게 애쓰셨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라는 성경구절이 새삼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분이 땅으로 되돌아가시던 계절을 앞두고 일상에서 잊고 지냈던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