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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나라의 어른이 Mar 06. 2022

세상을 횡적으로 관통하는 발라스트(ballast)

같은 이름, 다른 쓰임새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


 수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그리고 여전히 그 상흔이 가시지 않고 있는 세월로의 침몰사건으로 수많은 이슈가 대두되었다.  그중에서도 사고의 원인 분석과정 중에 들려온 낯선 용어인 '평형수(ballast water)'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본다.   이 물질은 '선박의 항해 중 복원력을 유지하기 위해 맨 아래층에 일정량의 채워 넣는 물'을 지칭하는데,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기준에 미달하는 량을 사용하고 그만큼의 추가 화물을 대신 실었다는 논란이었다.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얽힌 사건이지만 이 평형수의 법적 기준치가 준수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배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수백에서 수천 톤의 물, 대개 바닷물을 사용하는 탓에 물 대신 화물을 추가 적재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해외로 이동하는 선박의 경우 지역 해양 생태계에 존재하는 해양생물이 함께 채워지게 되기 때문에 화물을 싣고 내리는 과정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적정 평형수 주입, 배출을 반복하다 보니 해양생태계 교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는 선박평형수 관리협약에 따라 여과기, 자외선 살균, 오존살균 및 전기분해 등으로 처리하는 장치를 활용하거나, 아예 평형수 없는 선박 디자인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이 평형(ballast)이라는 용어를 따라가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도용 선로에서 사용되는 자갈 또는 굵게 깨어진 돌과 함께 구성된 콘크리트 구조물을 지칭하는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열차의 하중에 따라 철로(rail)를 지지하고 있는 침목 등의 중량을 고르게 지면으로 전달하고 철로 주변 잡초의 생장을 억제하고 주변의 배수(配水)를 용이하기 위해 발라스트를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 조명기기 중 우리 삶에 친숙하게 여겨져 왔던 형광등에서 회로의 전류를 안정시키기 위해 꼭 필요했던 안정기(ballast)도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LED 전등으로 대부분 대체되고 있어 이 용어는 흔하지 않게 되었다. 


  철강사업분야에서도 이 발라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역시 근본 원리를 따져보면 비슷한 배경을 담고 있다. 고로를 새로 건설하거나 사용 후 재건축? 하는 것을 개수(改, relining)라고 하는데, 최초 가동을 시작할 때 쇳물과 함께 배출되는 돌 찌꺼기(슬래그, slag)를 신속하게 배출하기 위해 사전에 일정량의 발라스트(ballast)를 사용한다.  고로용 발라스트는 사전에 기존의 고로를 통해 제조하는데 통상의 슬래그보다 염기도(basicity)가 낮게 제조된다.   높은 온도로 가열된 고로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녹아 나오는 내화물을 흡수하면 목표로 하는 슬래그 염기도보다 높아지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평소보다 낮은 염기도의 발라스트 슬래그를 활용한다. 고로 최초 조업의 성공 여부는 초기 슬래그가 잘 배출되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철강슬래그는 현재 대부분 법적으로 폐기물로 정의되어 있어서 정해진 구역 내에서는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지역을 벗어난 유통은 자유롭지 않다.  특히 아직 법규상 이 물질에 대한 정의가 되어 있지 않은 신흥개도국에서는 고로를 신설하여 가동 전에 외부로부터 수입해야 하지만, 통관 시 적용 근거가 없어 혼란을 겪기도 한다.  아마도 포항제철소의 최초 고로인 1고로 가동을 위해 사용했었을 텐데, 아마도 발라스트는 설비 공급을 담당했던 일본에서 수입해 왔을 것이고 당시 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따라 법적인 문제없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꼭 필요하지만 무심히 넘겨왔던 이 '평형 물질(ballast)'는 여러 분야의 오랜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전혀 다르게 보이는 산업인 선박, 제철, 철도  그리고 전력 분야에서 서로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각각 담고 있는 의미는 공통적으로 '균형(balance)'이라는 개념 품고 있다.   평형(平衡)이라는 용어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는 기능'을 고려하여 물리적 환경에서는 안전과 관련된 보완장치로, 심리학적으로는 정서적 안정을 의미하고 있다.   대부분의 공학설계에서는 '균형유지의 필연성'이 항상 중요한 주제이기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선택'을 오랜 경험을 통해 최적화시켜왔다.  

 하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확인(check)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과정 없이 균형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된 평형수, 철도용, 조명용 혹은 고로용 발라스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준치를 정해서 필요조건을 지키는 방식이 규정화되어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의 존재는 예외 없이  견제(확인)가 부실한 여건에서 출현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발라스트'라는 단어를 통해 횡적으로 관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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