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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미수 Oct 31. 2020

고단한 삶에 이것마저 없으면 무엇으로 버티겠는가

중독의 역사

아버지는 작은 도시의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있다. 따분하고 고된 일이 끝나면 동료들끼리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스트레스 푸는 게 하루 일과다.


아버지의 술담배는 어린 나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담배냄새 때문에 같이 밥 먹기도 싫고, 술 마신 날은 내게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주었다. 또 언제 술 먹고 집에 들어올지 모르니까 늘 조마조마했었다.

세상에 왜 담배란 게 있고 술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다. 저 나쁜 물건들이 왜 버젓이 팔리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담배로 폐암 걸리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술로 싸움이 나고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국가가 왜 막지 않는 걸까. 대충 듣기로는 경제 때문이란다. 그거 못 팔면 기업들은 어찌할꼬. 세금은 누가 낼꼬. 어린 나는 이해할리가 없었다. 사람이 먼저지 않아? 내가 정치인이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담배, 술을 다 없애버릴 텐데. 나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내가 어른이 되고 세월의 풍파를 겪더니 이제 뭔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경제고 뭐고 술담배 확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꼬마였는데 ‘세상이 그렇게 쉽지 않구나,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은 너무 이상적일 수도.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겠네... 사회가 이렇게 발전하는 데는 다 대가가 있다고 한다. 모든 성공에는 대가가 따른다는데, 어쩌겠는가.


‘중독’하면 떠오르는 게 참 많다. 술, 담배, 마약, 게임, 도박, 음식, 설탕, 커피, 탄수화물, 인터넷...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들은 우리에게 빠르고 일시적인 쾌락을 준다. 데이비드 T. 코트라이트의 책 <중독의 시대>는 인류가 자연에서 우연히 쾌락을 발견하던 데로부터 의도적으로 재배하고 전파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쾌락을 설계하고 생산판매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 ‘중독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 역사 속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내 주의를 끄는 것은 평범한 하층민들의 애잔한 삶이었다. 예전부터 중독은 가난한 자들을 따라다니는 위안이자 파괴였던 것.


중독의 역사


1. 농업혁명의 덫

농업은 문명을 탄생시켰고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조상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농업혁명 후 처음에는 대부분 키, 건강, 지위, 수명이 감소하여 엄청남 대가를 치렀다.” 그니까 “최근 250년간의 급속한 물질적 진보와 125년간의 건강개선 및 수명연장은 과거 1만 1,000년 동안의 고통과 짧은 수명을 견뎌내야만 했다.” 어떻게 견뎠겠는가. 술, 코카나무, 게임, 담배, 대마초가 그들의 탈출구이자 안식처였다.


2. 산업혁명과 도시 노동자

19세기-20세기 초, 산업화된 도시에 이주민들이 모여들고 그들은 악덕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술 담배, 도박, 성매매와 같은 악덕에 노출될 기회가 많아진다. 게다가 열악한 환경과 단조로운 삶은 도시 노동자들이 적은 임금을 술담배에 써버리도록 내몰았다. 엥겔스는 “노동자는 술을 마시라는 모든 유혹을 받고 있다. 증류주는 사실상 그들의 유일한 쾌락이고, 구하기도 매우 쉽다”라고 묘사했다. 고단한 삶에 이것마저 없으면 무엇으로 버티겠는가.


3. 반악덕 운동

이토록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악덕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대부분 ‘반자유의지론자’라고 한다. 환경이 사람에게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주며 개인적 의지만으로 중독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지 않겠는가? 그들은 금주법, 담뱃세 등 수단을 통해 각종 악덕을 규제하고 또 일정 효과를 보기도 했다. 악덕은 잠시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곧 다시 머리를 치켜들고 기승을 부리게 된다.


4. 제2차 세계대전

전쟁만큼 스트레스 주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군대에는 담배, 술, 성매매와 같은 악덕이 다시 정상화되었다. 독일군은 공포와 수면을 억제한다는 이유로 필로폰 알약을 군사 약품으로 보급했고 독일군의 ‘뛰어난 전투력’을 본 영국과 미국 군대에서 곧 사태를 파악하고 자국의 군인들에게도 알약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약성분의 알약은 전쟁이 촉매 역할을 하여 사용자가 늘어났고 그 재고가 전후의 암시장으로 흘러들었다. 물론 ‘참전용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약물’을 복용해야만 했고 구하기도 쉬웠다. 전쟁 고아들은 이러한 약물로 허기를 달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끔찍하다.


5. 현시대의 노동자

오늘날 기업들의 현란한 마케팅 수단과 정계 로비를 통해 중독산업은 계속 번창해가고 중독자들은 점점 빠져나오기 힘든 세상이 왔다. 담배는 시크하고 초콜릿은 낭만이고 콜라는 청춘이다는 식의 마케팅이 판을 친다.

나는 저자가 제시한 두 가지 구체적인 해결책에 주목했다. 첫 번째는 대부분이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광고하라. 두 번째는 가격을 높이고 광고를 제한하고 접근성을 떨어트리는 것이다.


첫 번째 방안을 곱씹어 보았다.


아버지와 내가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내가 말했다. 아버지가 건강에 해로운 술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은 큰 세상을 보지 못해서라고. 같은 직장에서 같은 업무를 수십 년째 하고 일상이 무미건조하고 주변에 자신과 같이 고단한 삶을 사는 동료가 많으니, 세상이 원래 이런 거고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고 자기 위안을 얻겠지만 바깥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산다고 투덜댔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래 니가 잘 돼서 나를 그런 큰 세상을 보게 해 달라”라고 말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나서도 나는 아버지에게 ‘큰 세상’을 보여드리지 못했다. 잘 돼서 부모님을 큰 도시 큰 집에 모셔서 살고, 일 때려치우고 이곳저곳 여행하고 취미생활을 하며 인생을 즐기도록 해주고 싶은데 현실은 나도 밥벌이에 매일매일 허덕이고 있는 신세니까.


21세기 사무직 노동자인 나는 9시부터 6시까지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힘들다. 시간제 계약직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계속 시계만 바라보며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지 않아?’하고 묻을 수 있겠지만, 요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 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다가 나는 커피를 마시면 그나마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카페인이 들가면 심장이 빨리 뛰며 머리가 한바탕 열기가 올랐다가 가라앉으면 3-4시간은 지나가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매일 커피를 마시며 좀비 같은 직장생활에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습관을 유지하게 됐다. 조금만 지쳐도, 조금만 짜증 나도, 조금만 지루해도 늘 커피를 찾게 된다. 커피를 안 마신 날은 우울하고 기분이 안 나서 그날 하루는 버렸다고 생각한다.

나조차 카페인 중독을 스스로 끊지 못하는데, 아버지의 수십 년 된 술담배 중독은 오죽하겠는가. 이런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정말 애잔하기만 하다. 아버지도 애잔하고 나도 애잔하다. 무기력한 게 아니다. 애잔하다는 것도 다 벗어나려는 노력을 많이 해왔기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겠는가.

<중독의 시대>를 읽고 나서 가장 큰 수확은, 아버지와 내가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선명히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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