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계관
지브리 작품이라고 하면 예전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다가 초반에 너무 지루해서 꺼버린 기억이 있다. 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나를 단번에 그의 작품세계로 끌어들인 책이 있었으니, 바로 수전 네이피어의 <미야자키 월드>이다.
“미묘한 우울감”
“미묘한 심리”
“묘하게 서정적인 분위기”
“슬픔과 기쁨이 절묘하게 조합된다”
“불완전성과 기묘한 우울감”
이 책은 ‘묘하다’는 표현을 굉장히 많이 사용한다. 나는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 미묘하고 아련한 느낌을 굉장히 좋아한다. 내가 BTS 화양연화 세계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가끔 분명히 즐겁고 긍정적인 스토리를 봤는데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낄 때가 있지 않는가? 그리고 나중에 문득문득 계속 생각난다. 뭐지? 하고 잘 생각해보지 않으면 내가 왜 이런 우울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이중적인 감정을 작품에 잘 녹여내는 듯하다. 예를 들면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신나는 추격전으로 막을 내리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나오면서 흐르는 애절한 주제가는 덧없는 인생과 채워지지 않는 갈망을 노래한다. 이런 모순되는 요소들이 영화가 끝나도 두고두고 음미하게 되는 포인트가 아닐까.
그리고 이런 표현, “인간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장면과 동시에 덧없는 상실의 장면을 연출하는 이야기는 미야자키 세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수전 네이피어의 이런 미친 해설을 읽고 더 이상 지브리 작품을 안 볼 수가 없다 ㅜㅜ
아름다운 시골마을 풍경과 따뜻한 마음씨의 이웃들, 그리고 귀여운 토토로는 관중에게 즐거움과 힐링을 준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상실, 두려움 같은 힘겨운 감정들을 작품 속에 녹여냄으로써 “영화 전반에 흐르는 긍정적인 메시지에는 미묘함과 심오함이 감돈다”는 게 특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릴 적에 엄마가 8년 동안 결핵을 앓았다고 한다.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와 언제라도 병으로 죽을 수 있는 엄마는 어린 하야오에게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그는 이런 공포와 괴로운 감정들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눈에만 보이는 판타지(토토로)를 통해 그의 불안했던 유년기를 빛나는 시기로 재구성하였다.
영화에는 악당도 괴물도 나오지 않고 전쟁도 없지만, 어린 주인공들은 몹시 힘겨운 역경을 헤쳐나간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하는 것, 그리고 병에 걸린 엄마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아이들이 마주해야 하는 그 역경이다.
내가 특별히 감탄했던 것은 책 속 검댕 도깨비에 대한 해설이다. 검댕 도깨비는 주인공들의 활기찬 태도의 이면에서 감지되는 불안감에 대한 시각적 징표로 해석된다.
형체가 모호하고 새까만 검댕 도깨비들은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걱정처럼 사방으로 모였다가 흩어진 다음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메이가 검댕 도깨비 하나를 손으로 잡는 데 성공하는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약간은 오싹하다.
우리를 괴롭혔던 걱정이 사라지더라도 영혼에 흔적을 남기듯 메이가 꼭 쥐었던 손가락을 펴자 도깨비는 손바닥에 까만 자국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크흐~ 표현이 일품이야! 이런 해석을 안 봤더라면 나는 영화를 얼마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은 건 정말 행운이다!
그리고 목욕탕 에피소드에서 아빠는 무서워하는 소녀들에게 두려움에 대처하는 이상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자신은 귀신이 무섭지 않다고 말하며 바람과 소리를 향해 크게 웃는다. 두려움에 웅크리던 아이들의 이미지가 욕조안에 모여 앉은 따뜻한 가족의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영화의 무거웠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밝아진다. 이는 트라우마의 치료에서 중요한 안정감, 유대감, 두려움에 대처하는 기술, 능동적인 자세 이 모든 요소들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렇듯 지브리 작품의 성공은 비단 화면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상실과 슬픔 같은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심리적 깊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세계, 끌린다 끌려~
2013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 <바람이 분다>는 전쟁 미화 논란을 빚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일본의 한 청년이 아름다운 비행기를 설계하는 꿈이 있었는데 여차여차 노력하여 마침내 성공하였습니다, 근데 그 비행기들이 실제로는 전투기로 사용되었고, 간 비행기는 있으나 돌아온 비행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는 이야기. 영화는 전쟁의 어두운 면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한 청년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다. 살상 무기를 만든 자의 꿈이 아름다울 수가 있냐고요..
일단 내가 영화를 직접 보고 느낀 점은 전쟁 미화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괘씸하게 느낄만한 요소는 분명 있는 듯. 결론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 건 맞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꿈은 아름다웠다? 일본인 입장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완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괘씸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반성하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하고 자빠졌으니 “살긴 뭐 살어, 그냥 다 죽어~!!”라고 받아치고 싶은 거야~
그동안 늘 반전주의자로 알려졌던 미야자키이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노망 났다니, 우익으로 전향했다니 이런 소리까지 나오고 ㅜㅜ
이쯤에서 궁금한 것:
미야자키 하야오는 열렬한 전쟁 반대자이고 자신의 가족이 군수산업으로 재산을 늘린 것에 늘 부채감을 느껴온 사람이다. 이런 그가 왜 오해받을 작품을 내놨을까?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 다큐를 보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행기를 설계하는 건 저주받은 꿈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선이라 생각하고 하더라도 기계문명 그 자체의 앞잡이가 되어버리니까”는 식의 말을 하던데, 그는 왜 이런 메시지를 영화에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엔딩 화면에 “아무리 순수한 꿈일지라도, 전쟁에 이용되면 처참한 결말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는 자막을 띄우면 논란의 여지를 없앨 수 있는 건데.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의도가 너무 적나라해서 예술성이 떨어져 보일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보고 듣기에, 예술가가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오히려 반감만 살 수 있음. 그냥 각자 취향에 맞게 해석하는 거지~
더군다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답을 확신할 수 없다. 그는 전쟁은 반대지만 군사기술은 사랑하는 모순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군국주의나 제국주의가 팽배한 년대에 자란다면 자기도 열성적인 ‘군국 소년’이 됐을 것이며 스스로 전장에 뛰어 들어가 목숨을 바쳤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다행히 그는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 전쟁터가 아닌 예술분야에서 열정을 불태운다.)
그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은퇴하기 전에 자신의 내적 갈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국내외로 욕먹을 각오를 하고 이런 작품을 내놓은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영화에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과 한때 세계 정복을 꿈꾸던 야망에 대한 벅찬 감정이 묘하게 뒤엉켜 있다고 본다. 이번 작품은 미야자키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작품이었다. 남을 가르치거나 훈계하는 것 없이 그냥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여기서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진정 예술가다운 모습이 아닌가? 멋있다!! (호감도 급상승)
전작에서 트라우마를 아름다운 판타지로 재구성했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모든 불편한 진실을 아름답게 재구성했다. 저주받은 꿈이지만 찬란했고, 결핵도 죽음도 낭만적이기만 하다. 어둠 속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 이건 어쩌면 삶의 지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왠지 뭉클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논란 속에서 은퇴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만큼 화두를 던지고 사람들에게 생각거리를 준 거니까. 이번 책을 읽으며 예술, 메시지 그리고 표현방식에 관해 두루두루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유익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