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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미수 Jan 21. 2022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글쓰기에 영감을 주는 책


먼저 <최악을 극복하는 힘>에서 읽었던 지식들이 나와서 좋았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서 알게 된 버지니아 울프, 러셀, 리튼이 나와서 반가웠다.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것처럼 기쁘다. 웬일이야.. 잘못된 정신의학 치료로 고생했을 울프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뇌를 이고 산다는 게 문제다.” 이 책에 나오는 문장인데 정말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전지전능한 느낌을 받는 것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냥 그랬다고.


이 책은 문학에 관한 책이다. 문학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숨겨진 신경과학을 찾아낸다. 문학과 신경과학이라, 놀랍지 않은가? 저자는 문학을 아예 발명품이라고 칭한다. 각각의 문학 작품에는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는 기술이 들어있으며 이런 장치들은 모두 하나하나의 독특한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 표현은 참신하다, 이 생각은 기발해! 하면서 감탄을 금치 않았다. 말 그대로 글쓰기 기법이 가득 담겨있는 책이다. 특히 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이 책은 사람이 겪는 힘든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굉장히 의외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나를 놀라게 했던 점들을 한번 짚어보자.





문학은 내가 책 속의 캐릭터들과 같이 있다는 느낌을 주어 외로운 감정을 덜어준다. 그런데 왜 하필 펄프 픽션을 추천할까? 이 책은 펄프 픽션이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주는데 특히 효과가 있다고 한다. 펄프 픽션(Pulp fiction)은 싸구려 삼류소설을 뜻한다. 요즘 시대로 치면 약간 막장드라마 같은 느낌이랄까? 황당한 줄거리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아 그러니 왜 막장드라마가 인기 있는지 알 것 같다. 어처구니없는데 뭔가 끌린다. 이번 주 방송이 끝나면 다음 주까지 어떻게 기다려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른다. 다음 회가 방영될 때까지 들뜬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기다린다. 그렇게 또 팍팍한 삶을 일주일 버텨냈네. 이게 최고의 외로움 달래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책은 ‘부분 도파민’으로 그러한 원리를 설명해주는데, 너무 신기했다. 신경과학으로 우리의 감정을 설명해주는 게 신기하다.


또 예를 들자면, 절망을 다루는 장에는 사이키델릭이 나온다. 절망과 사이키델릭? 너무 의외인 조합이다. 절망을 이겨내려면 역시 약물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리고 분노를 다루는 장에서는 <오이디푸스 왕>이 나온다.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  분노와 오이디푸스가 무슨 연관이 있지? 되게 의외였다.


자아수용을 다루는 장이 있는데 나는 이 주제에 가장 적합한 소설로 <데미안>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의외로 정말 생각지도 못한 중국 소설 <홍루몽>이 나온다. 서양이 아닌 동양의 고대 작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발견하다니 이것 또한 신선했다. <홍루몽>은 등장인물이 아주 방대한데 주요 캐릭터만 해도 수십 명이 된다. 이 수많은 인물들은 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삶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책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고, 그 결과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더 편안하게 느낀다”. 이 구절을 보았을 때 정말 기가 막혔다. 소설에 이런 기법이 들어갔구나..  


다음은 내가 요즘 잘 다루지 못하고 있는 감정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어느 날 밤, 나는 분노라는 감정에 시달리며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세상에는 화가 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누가 있지? 아, 엄마를 다치게 했던 트럭기사. 왜 사람 다치게 하고 얼굴짝도 안 내밀어? 보험과 관련된 사람들. 왜 일을 질질 끌며 연락을 안 하지?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생각에 울분이 쌓인다. 괴롭다. 사실 예전에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을 매일매일 저주하려고 했었는데, 사람이 워낙 게을러서 여태껏 못하고 있다. 그러니 화가 쌓여 커다란 분노가 될 수밖에. 분노, 너라는 감정은 도대체 뭐냐?


이 책을 보니 분노의 기원은 꽤 오래된 듯하다.


우리 뇌는 정의에 대한 욕망을 타고났다. 그 욕망이 본성 속에 워낙 깊숙이 흐르는 걸 보면 우리 종보다 먼저 발생된 듯하다. 침팬지와 고릴라, 짧은꼬리원숭이도 모두 공정성에 대한 선천적 갈망이 있다 (...) 그 갈망이 워낙 강해서 우리는 피해 당사자가 아닌데도 공정성을 집행하려고 재산과 건강을 기꺼이 내놓는다.


정의? 공정성?


(나의 감정이 정의, 공정성과 연관된단 말인가? 난 그냥 화가 날뿐 한 번도 여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지나친 정의는 문제를 일으킨다. 사회적으로는 집단폭력 같은 사태가 있고, 개인적으로는 분노와 억울함 같은 안 좋은 감정에 휩싸여 증오심이 쌓이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해야 된다는 거지?)


이런 부작용 때문에 우리 뇌는 ‘공감’이라는 균형추를 개발했다.


(공감? 가해자의 관점에서 잘못을 바라보고 그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공감해주는 거? 말도 안 돼.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이때 공감력을 개선할 도구가 등장한다. 바로 ‘사과’이다. 가해자가 사과를 하면 우리가 그를 용서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 사과 안 하는 사람은 어떡하지?)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그러면, 가해자가 스스로 질책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가 그를 용서하는데  도움이 된다.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와 자책 속에 자기의 두 눈을 찔러버리는 장면을 보라. 가해자의 자발적인 후회는 우리 뇌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그 사람이 자책하는지 괴로워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이용해 용서를 연습할 수 있다. 저자는 분노에 찬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작품을 추천한다.


섬세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문학 작품

스스로 자신을 벌함으로써 후회를 입증하는 작품


여기까지 읽고 내 분노는 완화되었을까?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썩 내키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어쨌든 내가 느끼는 감정의 기원을 알아보고 깊게 이해를 한 것은 좋은 것이다. 저번에 엄마랑 통화하면서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로 뱉어냈더니 속이 후련했다.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방법은 역시 욕인가.. 나를 갉아먹는 분노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울분이 나를 비관하게 만든다. 다음 이야기가 필요하다.






먼 옛날, 유럽에 살던 샤를 페로는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어느 날 조카딸은 비관론을 치유해 주겠다며 그를 이야기 발표 모임인 화요 살롱에 데려갔다. 거기에서 한 남작부인이 이야기를 발표했다. 자기 병을 치유해줄 방법이 고작 이야기 듣는 거라니, 페로는 실망했다. 신비한 의사나 희귀한 약초 따위를 기대했는데. 더군다나 남작부인의 이야기는 무슨 심오한 내용이 아니라 공주와 계모가 등장하는 황당한 사건이었다. 페로는 몹시 실망했다.


“...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드디어 마지막 구절이 나오고 이야기는 끝났다. 그런데 웬걸, 페로는 뜻밖에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그냥 스쳐가는 기분이 아닐까 하여 소파에서 다시 우울함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우울한 생각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 장면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관적인 생각이 사라지자 페로는 다시 의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졌다. 그는 이 마법 같은 치유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깃펜을 들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물론 화요 살롱에서 들었던 이야기의 공식을 조금 업그레이드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렇게 써낸 작품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이다. 그날 화요 살롱에서 페로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이야기는 바로 요정 이야기, 즉 동화였던 것이다.


페로의 아름다운 동화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행복감 속에 이 찜찜한 느낌은 뭘까..


페로는 왕비다운 행동이 왕비를 낳는다고 했다. 즉 ‘예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데렐라 스토리에 담긴 교훈이다. 페로는 동화에 교훈을 가미하면 더 훌륭한 스토리가 될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은 점점 신데렐라의 비현실적인 면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 늘 나쁜 캐릭터로 등장하는 계모.. 과연 합리적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0년대 이후의 이야기꾼들은 페로의 이야기를 고쳐서 좀 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줄거리를 어둡게, 도덕성은 모호하게 하여 현대판 신데렐라를 탄생시켰다.


이런 스토리텔링 방식은 요정 이야기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뿐더러 화요 살롱에서 나왔던 치유법에서 훨씬 더 멀어져 버렸다. 요즘은 신데렐라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기회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동화가 점점 현실과 가까워지는 게 좋은 것일까? 자꾸만 교훈을 추가하는 게 과연 좋은 것일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치유법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낙관론에서 나온다. 우리는 삶이 완벽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동화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동화가 팍팍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자꾸만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면 어떻게 되나. 뿌린 대로 거둔다고, 나는 역시 안되나 봐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난 특별하지 않아서, 난 노력하지 않아서..


사실 화요 살롱에서 페로가 치유를 받았던 이유는 뜻밖의 ‘해피 엔딩’ 때문이었다. 이 해피엔딩은 인과관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연에서 나왔다. 이야기를 임의로 뒤집고 ‘행운의 반전’이 일어나는 데서 우리는 치유를 느끼게 되어있다.


여기서 오리지널 신데렐라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실 그녀는 수천 년 전에 이집트에 살았다고 한다. 로도피스라는 이름을 가졌고 직업은 창녀였다. 그녀는 새벽에 눈을 뜨면 자신의 운이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미모가 예전 같지 않고 벌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떨어진다. 새가 그녀의 가죽 샌들을 물고 날아가서 파라오의 무릎에 떨군 것이다. 파라오는 이것을 신의 계시로 여기고 로도피스를 찾아내 왕비로 맞아들였다. 갑자기 인생역전이 일어나다니.. 정말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이다.


이러한 반전은 우리에게 꼭 좋은 것에서만 좋은 게 나오는 게 아니라 나쁜 것에서도 임의로 좋은 게 나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별한 장점이 없더라도, 좋은 일 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행운의 반전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비관론 치유의 핵심이다.


근데 의문이 든다. 뭔가 비현실적으로 낙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막연한 낙관론이 과연 인생에 도움이 될까?


신경과학자들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뇌는 투쟁-도피 반응을 촉발시키는 교감신경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좌뇌는 우리를 진정시키는 부교감신경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뇌는 잘못될  있는 것에 집중하기 쉽고 좌뇌는    있는 것에 집중하기 쉽다. 우뇌와 좌뇌의 분업 덕분에 사람은 위험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있다. 그래서 삶의 어두운 측면과 밝은 측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나아갈  있다.


만약에 우리가 비관론에 빠졌다면, 그 위해는 어마어마하다. 비관은 자살, 심장병, 뇌졸중의 증가율과 상관관계가 있다. 우리의 건강에 진짜 해로운 것은 낙관론이 아니라 비관론인 것이다.


그래도 현실을 봐야 할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근거 없는 낙관론이 좋은 거냐, 현실도피 아니냐.. 응?


근데, 어차피 뇌의 어느 한쪽도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방법은 우반구와 좌반구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러니 균형이 깨져 비관론에 빠져들었을 때는, 부정적 사고를 뒤집어 다시 균형을 잡으려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행운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행운의 반전은 그리스 비극과 희극에서 사용하던 기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페로가 화요 살롱에서 들었던 요정 이야기도 그 공식을 따랐던 것이다. 치유는 ‘뜻밖의 행운’에서 나온다. 여기서 행운은 임의로, 우연히, 뜬금없이 발생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근데 왜 페로는 이야기의 공식을 바꿨을까? 그에게는 걱정이 있었다. 나쁜 스토리텔링에 대한 걱정. 이게 과연 좋은 스토리텔링인가? 갑자기 마법사가 나타나고 아무 이유 없이 행운의 반전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쓰면 무능한 작가로 여겨지지 않으려나.. 너무 쉽게 아무렇게나 막 쓴듯하잖아.


글쎄다, 이건 나도 의문이다. 행운이 이유 없이 떨어지면 너무 엉뚱하지 않을까?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할까? 정말 그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를 써가지고 훌륭한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끊이지 않는 마음속 질문들..


흠..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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