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피에르 위그전>, <현대미술 소장품>을 통한 '인간다움'
주말 이른 아침, 부산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몇 달 전 예매에 성공한 발레 <지젤>을 보기 위해서였다. 발레만 보고 오기 아쉬워 리움 미술관의 전시까지 예매했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란 명목으로 떠난 짧은 여행이었다. 기차 안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다 한 구절에 눈이 멈췄다.
다른 분야에서는 선배들만큼 공부하면 더 이상 알 것이 없지만, 과학에서는 계속해서 새것을 발견할 수 있고, 놀라운 것들이 나타납니다.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면 한 분야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도 해당 분야에서 대가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현대지성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대학에서 공부하며 느낀 과학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문장이었다. 최근 공연에 흠뻑 빠져 시간과 돈을 쓰는 내 모습이 투영되며 가슴이 뜨끔했다. 예술이란 드물게 천재가 나타나는 매우 희소한 분야이고, 대부분 과거의 것을 연구하는 데 애쓴다. 셰익스피어만큼 공부한다고 해서 그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내긴 어렵다. 분명한 한계가 있다. 당장 <지젤>도 새로운 것이 아닌 19세기에 만들어진 과거의 것이다. 이에 반해 과학은 과거가 기반이 될 뿐이며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새롭고 놀라운, 세상에 없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숫자로 계산되는 이론 앞에서 무형의 예술을 향한 나의 무른 마음은 자주 무너진다. 과학과 경제라는 합리적인 학문과 돈으로 능력이 치환되는 현실 앞에 서면 예술에 애쓰는 마음은 철없는 욕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뚜렷한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 예술은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언가' 같다. 여러 사정으로 두 달째 일을 쉬고 있는 내 현실도 초라한 기분에 한몫했다.
현실에서 예술은 가치 있을까?
예술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무의미할까?
과학의 발달은 세상의 패러다임을 뒤엎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술로 변화하는 시류에 자연스레 몸을 맡긴다. AI가 바꾼 요즘 모습을 보면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있나 싶다. 기존의 연구가 새로움의 바탕이 되어 무한의 계단을 올라가듯 끊임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
반면 예술은 세상을 스펙터클하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바뀐 세상의 모습을 반영하여 변형된 형태의 예술을 만들며, 일반적인 대중이 아니라 예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다가가는 한계가 있다. (대중예술은 다른 분야이긴 하다) 지금도 예술은 과거의 업적이 현실을 지배하며, 17세기 바흐 음악, 19세기 지젤이 여전히 메인 무대에 오른다. 몇몇 유명한 작가를 제외하고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다. '실용성'을 기준에 둔다면 예술은 몇 점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예술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배부른 소리같이 느껴졌다.
먹먹한 마음을 안고 서울에 도착했다. 지인을 만나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리움 미술관으로 향했다. 사실 미술관에 가기 전 유튜브로 피에르 위그전의 리뷰를 찾아보다가 전시를 잘못 골랐다 싶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전시였건만 주제가 생각보다 난해하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전시 제목인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리뷰를 보다가 내가 리미널 상태에 빠져버렸다.
현대미술은 끊임없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미술의 형태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더 중요하다. 피에르 위그의 작품들이 인간성과 비인간성에 대해 논한다는 짧은 사전 지식을 안고 어두운 전시장으로 향했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 <휴먼 마스크>/ 알베르토 자코메티 <거대한 여인 Ⅲ>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 리움 미술관의 《현대미술 소장품》을 둘러보며 기차 안에서 가졌던 예술에 대한 무용성에 대한 답을 찾아나갔다.
먼저 피에르 위그의 작품들을 둘러봤다. 여러 작품 중 <리미널>과 <휴먼 마스크>가 대조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리미널> 속 인물은 가운데 얼굴이 뚫려 비어 있는 채로 어둡고 공허한 공간을 배회한다. 주변에는 특별한 사물도 없고, 인물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반면 <휴먼 마스크>는 원숭이가 사람의 탈을 쓴 채 버려진 식당을 돌아다닌다. 그 공간에는 인간의 흔적이 남은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탈에 그려진 무표정한 눈코입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진다. 형태만 보면 <리미널> 속 인물이 더 '사람'에 가까워 보이지만, 영상을 보는 내내 오히려 <휴먼 마스크> 속 원숭이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무엇을 통해 인간다움을 느끼는 걸까?
다른 작품을 보면서도 두 작품의 잔상이 머리를 지배했다. <리미널>의 사람보다 <휴먼 마스크> 속 원숭이가 더 끌리며 원숭이의 행동에서 사람다움을 찾는 나에게 의문이 생겼다.
'무엇을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다움의 기준은 무엇일까?'
<휴먼 마스크> 속 가면에 그려진 눈코입의 형태는 원숭이를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심지어 <리미널>의 벌거벗은 인물과 달리 원숭이는 옷도 입고 있다. 무엇도 걸치지 않고 표정이 없는 <리미널> 속 인물보다 <휴먼 마스크>의 원숭이에게 더 인간다움이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두 작품은 연작도 아니며, 10년이라는 시간 차가 존재하지만 작가의 세계관을 통해 연결됐다. '인간다움'이 형태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행동이 전달하는 의미를 통해 전해지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다른 작품을 둘러보며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려 했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현대미술 소장품> 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대미술 소장품 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은 알베르토 자코메티 <거대한 여인 III>이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마르고 긴 형상으로 사람을 표현했는데, 앞선 작품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인간 형태를 지닌 미술 작품이었다. <거대한 여인 III>은 인간의 모습을 형이상학적으로 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이 느껴졌다. 왜 나는 이 딱딱한 조각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느냐란 질문에 빠진 채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의 조각을 맞추어 나갔다.
다른 작품을 둘러보던 와중 모호한 감정이 정리됐다. <거대한 여인 III>에서 인간다움을 느끼는 이유.
바로 감정이었다.
최소한의 요소로 구성한 조각에서 신기하게 감정이 느껴졌다. 거친 질감, 비이상적으로 길게 뻗은 팔과 다리, 그리고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은 딱딱한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품고 있었다.
<리미널>의 얼굴이 빈 사람에게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영상을 보는 내내 지루하기까지 했다. <휴먼 마스크> 속 원숭이는 사람의 손길이 가득 묻은 빈 식당에서 마치 사람처럼 움직였지만, 마스크 뒤의 존재가 원숭이라는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거대한 여인 III>에서는 의구심보다는 조각이 전하는 감정이 먼저 다가왔다 (이 모든 정리는 매우 주관적인 견해다)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게 하는 건 '감정'이란 나만의 결론을 냈다.
우리는 감정이 결여된 인간을 '인간미가 없다', '인간답지 않다' 치부한다. 그만큼 감정은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다고 여기게 하는 건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감정 표현의 정점은 예술에 있다.
예술을 추구하는 나의 마음 역시 감정을 느끼는 것, 얽혀있는 감정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예술 속 감정을 통해 의미를 찾는 것은 본능이다.
실용성의 측면에서 예술을 평가한다면 소수의 천재를 제외하고 예술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은 사람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욕구를 품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세대를 거쳐 같은 질문들이 반복된다. 그래서 현재의 내가 찾지 못하는 답을 과거의 성현에서 얻기도 하고 수 세기 전의 누군가 남긴 예술 작품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그 예술은 때로 위로가 되고 다시 오늘을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힘은 과학기술로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영역이다. 인위적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예술에 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며, 감정의 뿌리에서 비롯된 사유의 과정을 통해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쌓인 예술은 사유의 힘을 만들고, 단순한 표현을 넘어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인류가 시작되고 끊임없이 계속된 질문,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예술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을 안고 리움 미술관을 나왔다. 이후 예술의 전당으로 발걸음을 옮겨 <지젤>을 감상하고 밤기차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기차 안, 몸은 피곤했지만 미술과 발레로 채워진 마음 덕에 정신은 또렷해졌다. (한편 여행으로 줄어든 나의 잔고가 허전하긴 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내 마음을 뜨끔하게 했던 문장도 결국 문학이란 예술 속에 표현됐다. 나를 깨우는 건 스마트폰의 기술이 아닌 누군가 그린 그림이고 음악이고 글이다. 숫자로 증명되지 않으며, 당장 결과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한 것이지만 어떤 것보다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 그 무형의 세계가 바로 예술이다.
실용성과 현실의 균형 사이에서 나 자신이 쓸모없이 여겨지거나 죄책감에 빠지는 순간은 여전히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 균형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다. 그 가치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은 내가 사람이기에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마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