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장류진

반짝이는 나의 시간

by 겨울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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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된 계기


장류진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단편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일상의 감정들이 녹아있었다. 회사 동료의 청첩장을 고지서처럼 받으며 축의금 액수 고민하는 내용이라든가, 맞벌이를 하며 도우미를 쓰는 내용이 지나간 회사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 접한 소설의 내용은 가볍게 평하자면 네이트판의 수다가 소설이 된 느낌이었는데, 그 변화가 매우 좋은 쪽으로 신선했다. 소설을 읽으며 나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학부 시절 글을 쓰는 일에 매진했다면 나도 이런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과 진짜 쓰는 건 너무나도 다른 영역이란 걸 알고 있다. )


책을 읽을 때 가독성을 중시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은 이후 장류진 작가는 내 마음속 신간이 나오면 읽고 싶은 작가로 분류됐다.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은 장류진 작가의 첫 에세이집이다.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책을 읽기 전 기대한 점


에세이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소설보다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에세이를 고를 때 작가에 대한 호기심 유무가 큰 역할을 한다. 소설로만 접해온 장류진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을 에세이를 통해 알고 싶다는 생각에 어떤 내용인지도 살펴보지 않고 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은 작가가 대학시절 6개월간 머물렀던 핀란드를 십여 년이 지난 후 친구와 함께 여행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도 대학생 시절 일본 교토에 위치한 대학의 단기 여름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기에, 대학생 신분으로 타국에 머무는 건 어떤 경험보다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걸 알고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름이 되면 내가 머물렀던 교토와 대학교의 캠퍼스가 생각나곤 한다. 그럴 때면 교토의 작은 마을을 다시 방문하는 장면을 꿈꾸곤 하는데, 나의 바람을 닮은 작가의 추억 여행을 통해 간접 경험하고 싶었다.





▶나를 사로잡은 포인트





1. 매력적인 핀란드



살면서 지금까지 핀란드를 여행의 장소로 염두에 둔 적이 없다. 물리적으로 먼 거리와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는 심리적 거리까지 멀게 만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핀란드의 매력을 맛볼 수 있었다. 책 앞쪽에 나오는 핀란드인들의 특성에 대해 읽으며 내가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만난 핀란드인들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참여한 베트남 워크캠프에 사회학 논문 연구를 목적으로 온 세 명의 핀란드 학생들이 있었다. 모두에게 마음을 열고 지내던 나였지만 늘 무표정한 핀란드 학생들의 표정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신경 써야 할 사람이 많았기에 친해지려 애써 노력하지도 않았다.


여태껏 핀란드 사람이라곤 '따루'밖에 몰랐기에 일반적으로 핀란드 사람들이 감정의 표현이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이 많다는 에세이 속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정보였다. 내가 만난 세 명의 핀란드인들이 유독 낯을 가린다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야 그들이 핀란드인의 전형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걸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예전에는 그 무뚝뚝함에 거리감을 느꼈는데 다시 핀란드인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 거리감이 되레 편하게 느낄 것 같다.


image.png?type=w773 책을 읽으며 가장 궁금해진 <캄피교회> / 출처 공식 홈페이지



책 속에서 소개하는 장소도 인상 깊었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쿠오피오 대학 전경의 모습은 추억을 공유할 수 없기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후반부에 나오는 헬싱키 여행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다. 캄피교회, 아카데미아 서점,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알토 하우스에 대한 묘사를 읽다 장소가 궁금해 검색을 해보곤 했다. 책 속에 사진이 없어서 일부러 찾아봐야 했지만 그 덕에 더 많은 호기심이 생겨났다. 가끔 여행을 다룬 책을 읽을 때면 여행지를 갔다 와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쿠오피오 대학에 대한 묘사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헬싱키 여행기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 꼭 한 번 핀란드를 가보리라 마음속에 적어두는 계기가 생겼다.




2. 기억의 외장하드가 되어 주는 '친구'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은 핀란드 교환학생을 함께 한 친구 예진과 함께 15년 만에 리유니온 여행을 떠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추억을 공유한 친구와 같은 장소에 다시 머무는 건 많은 소회를 떠올리게 한다. (P.62 예진이와 함께 핀란드에 와 있으니 한편으로는 과거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룰 수 없던 미래에 온 것 같기도 했다.)


교환학생을 계기로 긴 시간 친구가 된 예진이는 닮은 점이 많은 친구라 묘사된다. 거울 치료와 같이 나와 닮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여행의 순간들이 인상 깊었다. 밑줄 그은 장면들도 예진이를 통해 본 작가 자신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15년 만의 리유니언 : 눈더미가 차츰 녹아내렸다


p.55 예측 가능한 것을 좋아하는 ‘계획형’ 성향인 나는 예진이가 먼저 이런 스프레드시트를 세팅해 주었을 때 왠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예진이가 아닌 다른 친구들과 있을 때에는 항상 내가 이런 걸 계획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그 역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물론 그게 사실이기도 했지만 예진이가 먼저 해주는 것도 좋았다. 나는 계획이나 정리를 직접 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계획이 이미 되어 있는 상황 자체를 좋아하는 면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닮은 사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의 결이 있다. 나도 친구들과 여행을 할 때면 내가 주가 되어 계획을 짜지만 나보다 더 계획적인 남편과 여행을 할 때면 온전히 의지한다. 그의 철저함이 나는 자주 고맙다. 닮은 사람은 이래서 좋은 것 같다.




쿠오피오 : 눈이 녹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p.62

2023년 7월 13일 오전 6시. 우리는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했다. 통유리 너머 우리가 타고 온 핀에어 비행기와 ‘Ulos(출구)’라는 핀란드어 사인을 보자 아득하고 막연한 꿈을 꾸는 것처럼 얼떨떨해졌다.


이토록 어리둥절한 느낌이 드는 건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동시에 들이닥쳤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예진이와 함께 핀란드에 와 있으니 한편으로는 과거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룰 수 없던 미래에 온 것 같기도 했다.



p.70

미꼬의 포드승용차에 우리의 캐리어를 차곡차곡 싣고 나는 조수석에, 예진이는 뒷좌석에 탔다. 예진이와 나는 우리 미꼬가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차도 있고 픽업까지 오느냐며 기특해했다. 사실 미꼬는 우리보다 두 살이나 많았음에도 이상하게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어릴 때 만났던 사이라 아직도 서로 어린 학생처럼 느껴졌다.


그건 미꼬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꼬도 우리가 자국에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회사도 다니고 책을 쓰기도 하고 차를 사서 운전도 하고 다니는 걸 보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겠지. 미꼬는 늘 우리를 ‘걸즈’라고 칭했으니까. 미꼬 역시 여전히 그때 그대로 소년 같았다.




->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도 그대로인 느낌이 든다. 시간의 간극을 과거의 기억으로 메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매번 예전 일들이 화두로 떠오른다. 그 시절 우리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채로.




p.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이 내가 마음속에 남긴 무언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건 정말인지 ‘무언가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소설을 읽고 났을 때 각자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형태로 남는 고유한 자국이다. 소설마다 다르고 또 그 소설을 읽는 사람 각각이 다른, 두 지문의 결합같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자국.


p.135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가 좌우명이라는 예진이를 향해)

“기억은 안 나지만 15 년 전 여기 도착했을 즈음에는 나도 너처럼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럴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쪽으로 생각이 계속 흘러웠던 것 같아. 그러니까, 제대로 된 ‘가죽’을 갖추고 살아가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이다. ‘이름’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무 데도 남기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이십 대 중반부터 삼십 대가 될 때까지 내내, 나는 되도록 큰 집단에 속해서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그걸 엄청 간절히 원했었어.”


p.144

오랜 친구는 마치 기억의 외장하드 같다. 분명 내게 일어났던 일이지만 자주 꺼내지 않아 그곳이 었었는지도 잊은 일들을 친구의 입에서 들을 때, 왜인지 부끄러우면서도 든든하다.


p.233

(컵라면의 뚜껑을 그릇으로 덮어놓는 같은 습관을 발견하곤)

“너랑 있으니까 내가 정상 같아.”



-> 마음이 맞지 않는 이들을 만날 때면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할 때가 많다. '내가 예민한 걸까?', '내가 잘못된 걸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르다. 하지만 그간 나를 만들어온 것들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진실에 가깝다는 결론을 오랜 방황 끝 마음에 품었다. 이런 고민이 들 때면 오래된 친구에게 마음을 토로하곤 한다. 나에게 좀 더 가까운 이의 위로는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준다.




3. 여행의 끝은 '나'


책 전체를 통틀어 '알토 하우스'에서 느낀 작가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디자이너 알바 알토는 핀란드 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핀란드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아르텍을 아트 디렉팅하기도 한 알바 알토가 직접 지은 집이 바로 '알토 하우스'다. 북유럽 인테리어의 정석인 그의 집은 대부분 곡선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조화를 통해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알토 하우스를 둘러보며 모든 것이 깊은 고민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자연스럽다'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린 시점이었다.


자연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잡초가 무성하고 삐죽삐죽 자라난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위치한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분별한 모습보다 사람의 손이 닿아 정돈된 자연을 더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결국 '자연스럽다'는 것은 섬세한 손길이 닿아야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자연스럽다 느끼는 모든 것들은 사실 정말 많은 노력 끝에 나온 것들이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내 삶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금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많은 것들이 타인에게 자연스럽게 비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정돈된 형태로 가꿔내야 할지에 대한 심연에 빠졌다. '자연스러움'이란 키워드는 내 머리를 꽤 오랜 시간 지배했다.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는 순간 평소 인식하지 못한 마음속 걸림돌의 답을 찾을 때가 있다. 여행은 일상을 떠나는 자유만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란 생각이 든다. 여행 후엔 정확하게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남는다. 그 감정은 해소일 때도 있고 허무함일 때도 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여행 직후 마음을 지배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는 경우도 빈번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남는다는 점에서 여행은 가치가 있다 확신한다. 낯선 환경을 대하는 나를 돌아보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깨닫는다.


image.png?type=w773 알토 하우스 / 출처 공식 홈페이지



헬싱키 : 이야기가 걸어나가자, 그 자리에 햇살이 깃들었다


p.261

여행지로서의 도시를 친구에 비유한다면, 파리, 런던, 뉴욕은 누구나 좋아해 마지않는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화려하고, 아름답고, 오로지 자신만이 뿜어낼 수 있는 고유한 분위기까지 가지고 있어 매력적인 친구. 늘 주변에 친구들이 넘쳐나고 나 역시 자꾸 힐끔힐끔 올려다보게 되는 그런 친구. 하지만 동시에 저 친구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자꾸만 신경 쓰고 의식하게 만드는 친구. 과연 그 친구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 줄지, 문득 의심 들게 만드는 친구.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친구.


헬싱키는 그와 반대로 긴장을 풀게 만들어주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력적이지만 누구에게나 그 매력이 다 알려지지는 않은 친구. 다만 소리 없이 내 곁에 있어주는 친구. 그렇게 옆에서 가만가만 오래오래 들여다보면 비로소 반짝이는 친구. 내가 이 친구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써본 적 없는 친구. 친구라는 걸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 친구. 언제 만나도 편하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대하게 되는 그런 친구.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항상 있어줄 거라는 안정감과 신뢰를 주는, 그야말로 ‘진정한 내 친구’ 같은 느낌을 주는 도시가, 내게는 바로 헬싱키라는 생각이 들었다.


p.269

나는 예진이와 부모님의 옆에서 나눠 듣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중략) 그때의 나는 아마도, 환하고 커다란 온기가 뿜어져 나오는 쪽으로 슬쩍 손바닥을 내밀고 곁불이라도 쬐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p.345

알바 알토 하우스와 오피스 투어는 잔뜩 기대했음에도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가 추구하는 미감이 소박하게나마 조금씩 쌓였는데 이곳에서 그 모든 것의 원형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내가 가지고 싶어 하고 누리고 싶어 했던, 그 모든 것들의 ‘진짜‘가 다 여기에서부터 온 것이구나, 깨달았다. (중략)


알토 하우스는 ‘자연스러움’을 최우선의 가치로 추구하는, 합당한 이유가 없이는 아무것도 더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알토가 자신의 예술관을 온전하게 실현한 공간처럼 보였다. (중략)


분명 알바 알토의 집과 사무실은 자연스럽고 차분하고 고요한 정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자극을 받은 것 같아 머리는 차분해진 와중에 이상하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중략)


“세상에는 두 종류로 나누자면 무던한 사람이 있고 예민한 사람이 있는 거잖아. 굳이 나누자면 말이야. 음……뭐랄까……” (중략)


“예를 들면 그래, 커튼 말이야. 예를 들어 커튼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원하는 커튼이 무엇인지 오래 비교하고 생각해서 신중하게 고르게 되잖아. 커튼 같은 건 비록 자주 접혀 있더라도 매일 시야에 보이는 거고, 손쉽게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니까”


“그렇지. 야, 나는 손쉽게 바꾸는 거라도 신중하게 제일 마음에 드는 걸 찾아서 사.”


“나도 그래. 그러니까, 이건 좋고 이건 싫다는 게 내 마음에 뚜렷하게 있는 거잖아. 그 차이가 눈에 보이는 사람인 거잖아.”


“그렇지. 그런 종류의 사람인 거지”



p.354


사실 나는 최근 몇 년, 내 성격이 좀 피곤하고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


전혀 그렇지 않은, 감각이 무던한 사람도 있잖아. 커튼의 색이 바뀌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 아무거나 사도 상관없는 사람. 글을 쓸 때 문장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상관없는 사람. 이런 말을 해도 저런 말을 해도 상관없는 사람. 뭐가 내 맘에 쏙 들고, 덜 들고, 그런 생각 못하고 안 하는 사람. 어느 순간 그런 사람이 부럽고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거야. 그렇게 살면 매일 거슬리는 것도 없고 삶이 얼마나 편안할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하하, 호호.


그러다 오늘 여길 투어하면서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거야. 알바 알토, 아이노 알토, 엘리사 알토. 그 모든 ‘알토들’은 무지하게 예미한 사람들이었겠구나. 똑같은 곡선이라도 이런 각도는 되지만 이런 각도는 싫고. 컬로도 이 색은 되지만 조금 더 채도가 높은 이 색은 절대 안 되고. 그러면서 기능적으로 이걸 빼서는 또 안 되고……. 그런 것들을 피곤할 정도로 예민하게 굴면서 따지고 몰두하다가 딱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일의 총체적 결과물이, 바로 이 집과 사무실이었을 거 아냐.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을 말하기는 얼마나 자연스럽고 쉬워. 안 그래?


하지만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알토가 추구하는 그 ‘자연스러움’을 위해 얼마나 수많은 수고를 들이고, 반복적으로 계산하고, 까탈스럽게 굴었을지가 보여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더라.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스러움’은 ‘자연’이 아니야. ‘자연’은 그냥 놔두면 되잖아. 거기 이미 존재하니까. 하지만 ‘자연스러움’은 다른 얘기지. ‘자연스러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뾰족한 고민이 필요하겠지. 건물 전체가 곡선으로 구부러져 정원을 감싸는 형태의 알토 오피스는 무척 자연스럽고 아름다웠지만, 그런 형태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벽돌 하나부터 딱 원하는 각도로 구부러진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


그 생각이 ‘리얼한 소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더라. ‘리얼’은 그냥 현실 자체잖아. 그냥 어디에나 존재할 뿐인. 하지만 ‘리얼한 문장’을 위해 인물을, 설정을, 대사를, 심지어는 단어 하나의 글자 수나 조사를……수많은 요소들을 수도 없이 갈아 끼우고 그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또 돌려야 하잖아. 스르륵, 거침없이 읽히는 문장을 쓸 때는 그렇게 스르륵, 쓸 수가 없으니까. 맨질맨질함 표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친 원재료에 수없이 사포질을 해야 하듯이.


같은 애송이를 알토처럼 위대한 예술가에 비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독자분들이 재밌게 읽어주신 그 이야기는 나 자신조차 마음에 안 들어하는 내 성격이 해낸 일이겠지. 그러니 그걸 내세우진 못할망정 최소한 미워하지는 말자. 사람의 성격은 그 성격의 주인이 더 나은 방식으로 생존하게끔 발달한 거겠지.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그래서 나도 내 성격을 더는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려고.



▶책을 읽은 후 나에게 남은 것



책장을 덮은 후 '자연스러움'이란 단어가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해내기 위한 노력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회한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해내는 것에 좀 더 가치를 두고 꾸준함의 힘을 믿어보자 다시 한번 다짐했다.


헬싱키로 떠나고 싶어졌다. 그 나라에서 나는 매우 작은 여자일 것이다. 그 낯선 장소에 나를 파묻었을 때 어떤 내면의 변화를 느낄지 궁금하다. 책을 읽은 후 같이 일본에서 시간을 보낸 나에겐 예진이 같은 언니에게 리유니온 여행을 제안했건만 언니는 바로 거절했다. 나에겐 추억의 장소지만 언니는 그 이후 그곳에서 지독한 일 년 간의 교환학생을 더했기에 가고 싶지 않다 답했다. 리유니언은 이뤄질 것 같지 않지만 교토의 작은 마을을 혼자 찾는 꿈을 다시 마음에 품었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


- 핀란드가 궁금한 사람

-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엿보고 싶은 사람

- 친구와의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

- 장류진 작가가 궁금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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