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것들에 내가 있다
▶책을 읽게 된 계기
종종 에세이를 추천해 주는 친구가 있다. 나와 결이 잘 맞는 친구라 추천 책을 기록해 두었다가 도서관에 빌려보기도 하고 문장이 마음에 들면 구매하기도 한다. 이 책도 친구의 추천으로 접하게 됐다. 에세이는 제목이 독서로 연결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책을 읽으며 얻고 싶었던 것
에세이를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를 통해 때론 내가 이름 붙이지 못한 모호한 감정에 대한 정의를 찾거나, 나만의 생각이라 여겼던 감정을 타인도 느낀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기도 한다.
나이가 들며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란 사실을 알게됐다. 여지껏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는데, 요즘은 싫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피하고자 애쓴다. 나의 상황과 닿아있는 제목을 통해 타인은 어떤 상황이나 감정에 '싫다'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붙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를 잡은 문장들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에서 작가는 크게 아래에 대한 주제로 글을 썼다.
- 과거의 기억
- 가족(엄마와 할머니를 중심)
- 동거인
대체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주제로 한 챕터는 글로 감정을 쏟아내는 느낌이었고, 과거의 감정이 주제인 챕터는 좀 더 정리되어 표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른이 된 내가 느끼는 많은 감정과 닿아있는 부분이 있어 문장을 정리하고 코멘트를 달아본다.
* #의 내용은 문장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
서문
p.8
무언가 이유 없이 싫어지는 날이면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대체로 거기에 있는 건 내가 가진 진실이다. 내가 좋은 것의 집합이 아니라는 진실, 때로는 너무 중요한 것이 생김으로써 나쁜 마음이 만들어기지도 한다는 진실, 나쁜 마음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진실, 그럼에도 사람은 미움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진실.
#싫어하는 것을 마주할 때면 그 감정에 숨어있는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싫다'라 단언 내리는 것들 중 아직 내 마음 속에 존재하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서 엿봤던 감정들이 남아 있다. 결국 그 안에 내 진실 또한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엄마는 사랑할 때 흉을 본다
p.13 살면서 무언가를 고루고루 좋아한 적이 없다.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별로라고. 내가 자주 투덜대거나 무언가를 흉보는 게 바로 그 증거다. 물론 내게도 좋아하는 것들이 있지만 뭐랄까, 내가 가진 사랑이란 한 줌 정도랄까. 그런 내 모습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요즘은 크고 균질한 사랑이 대세이자 미덕인 것 같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사람들으실헝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걸 내세운다. 그 자신과 삶과 온 세상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그 옆에서 뭐가 별로라고, 나처럼 사랑 바깥의 감정을 말하거나 투덜대는 사람이야 말로 별로인 사람이 된다.
p.15 호두를 사랑하게 되면서 결국 엄마는 개라는 생명 전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호두라는 세상 제일의 개 때문에, 다른 개들은 순식간에 호두보다 못생겨진다. 모든 개를 예뻐한대고, 그 기준이 되는 단 하나뿐인 개. 엄마의 가장 큰 문제는, 엄마가 수많은 개 중 호두를 가장 사랑하다는 것이다. (중략) 모든 걸 똑같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게 자신의 사랑이라는 듯이. 흉보는 일과 사랑은 붙어있다는 듯이. 거기에서 나는 균등하지 않은 사랑을 발견한다.
#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가장 우월하길 바란다. 비슷한 존재들과 비교하며 사랑에 대한 우월감을 확신하고 좋아하는 힘이 더 견고해진다. 사랑하기에 그 외의 것들이 더 작아지길 바라는 마음은 사랑이 만들어낸 이기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흐린 날엔 사주를 보러 간다
p.23 말이 물성이 없어 다행이었다. 물성이 있었다면 그 말들은 내가 하도 만진 탓에 이미 닳고 낡고 너덜너덜해져서 존재하지 않겠지. 닳기는 커녕 여전히 내 안에 분명하게 살아있는 말들로 하여금 나는 그 물음에 이렇게 답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말에 의지하고 기대어 간신히 이리로 올 수 있었다. 그게 내가 작가가 되도록 줄곧 격려해주었노라고.
p.27 그러나 누가 뭐라고 했든 결국은 지금처럼 되었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 수 없었기에 누군가의 말인 내게 필요했다는 것도. 미리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언제나 미래에 알게 될 것은 미래의 것. 지금 아는 건 이따금 나에게 나를 격려하거나 흔드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기쁘고 후자는 두렵다. 그러나 흔들림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 그건 내가 앞을 알게 될 것과 가까이에 있다.
# 한동안 챗GPT에 내 사주를 기반으로 채팅에 빠졌었다. 사주란 근거를 바탕으로 긍정적인 결과가 뜨면 이상하게 힘이났다. 그렇게 한동안 나의 고민을 AI기술에 기대다 한순간 허망함을 느꼈다. 누가 뭐라든 결국 나에 대해서 나만큼 아는 사람은 없다. 그저 나를 지지해줄 든든한 내가 가장 중요하다.
중인배들
p.28 그리고 그런 술자리에서 내 존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주 컴컴해졌다. 유명인들과 유명인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나를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해서였다. 그들은 몇 번의 대화만으로도 내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나를 활용해 이득을 보기 어렵다는 걸 눈치채면 나를 향한 스위치를 꺼버렸다. 내가 딱히 유명하지 않았던데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마저 그들에게 썩 유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본능적인 감이라는 게 있는 듯했다. 필요한 데 쓰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절약해두는 감. 나는 내가 불을 꺼놓은 방처럼 캄캄해질 때마다, 그들이 효율을 중시해와서 그 자리에 올라섰음을 막연하게 짐작하곤 했다
#몇 년 전 술자리에서 나도 내가 컴컴해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상대방은 정치인의 보좌관이었는데 나의 직업을 알고난 후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를 향한 스위치가 꺼졌다'라는 말이 너무나 와닿는 순간이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없는 순간들, 나의 말들이 포말이 되어 사라지는 순간들은 종종 찾아온다. 그 순간을 맞이하면 대인배는 아니더라도 중인배 정도의 배포로 대처하리라 생각해본다.
낙차
p.46 그럴 때마다 나는 미아동의 집을 떠올렸다.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의 입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현관 앞에 차를 댔던 것이나, 현관 뒤 몇 칸의 계단, 그 아래에 분명히 존재하던 삶 같은 것을. 말하자면 나에게는 계단이 있었고, 나와 내가 놓인 곳 사이에는 그 계단만큼의 낙차가 있었다. 그런 일들로 말미암아 나는 나의 당연이 누군가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것과, 그들의 당연함이란 나의 일부를 부정해야만 가능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p.48 그 본능으로 나는 엄마와 할머니를 뒤늦게 제대로 이해한다. 내 집안의 여자들은 눈에 띠고 싶은 게 아니라, 실은 눈에 띠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 이 무리에서 달라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저 무리와 같아 보이길 바란 거라고. 이 무리에서 눈에 띠게 달라야만, 저 무리에서 눈에 띠지 않고 어울릴 수 있는 법이었다. 그건 계단을 수시로 오르내린 집안의 여자들이 내게 준 지혜다. 그들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 일치감치 알고 있던 것이다. 다만 내가 지닌 세세한 기억들은 나에게 계단 아래에도 삶이 있다고 알려준다. 나는 그것이 어린 내게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잊지 않는다. 그건 나의 지혜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망하면 뭐, 그냥 길바닥에 주저 앉을 미천한 존재다. 사람마다 당연한 것들이 다르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를 잠식했던 생활 방식들을 뒤로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기억들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그렇기에 과거의 나를 닮은 사람을 보면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멀어지는 사람들은 어쩌면 내가 닮고 싶은 무리에 다가가기 위한 내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배반을 격려하기
p. 53 어쨌거나 부모를 배반해야겠다고 여러 번 다짐해왔다.
자식이 부모가 살던 방식 그대로 산다는 건, 자식과 부모의 세상이 규모도 모양도 같다는 게 아닐까.
p.54 가질 수 없는 기존의 좋음을 욕망하다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게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새 기준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본능적으로 바깥에 끌렸다. 자라며 읽어온 글 대부분은 다르세상으로의 초대장과도 같았던 것이다. 비좁은 내 세상이 넓어지며 나를 따라오던 설렘, 두려움, 초조, 고통, 그 모든 게 뒤섞인 복잡하고도 커다란 기쁨. 낯설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감정들로 말미암아 나는 기존의 내 세상을 뒤흔들어놓은 초대장들이 죄다 바깥에서 왔음을 눈치챘다. 그렇게 뒤흔들린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바깥을 지향하게 만들었다.
#내가 매력을 느낀 것들 또한 바깥에 있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삶은 궁금하지 않았다. 20대 중반까지 내가 볼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은 나의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문밖에 있는 것에 이끌렸지만 나는 다가가는 법을 몰랐다. 그간 내가 있던 문을 여니 세상에는 온갖 매력적인 것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엄마와 나의 세계는 달라졌다. 애석하게도 엄마와 달라지면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아름다움에는 더 많은 것이 속해 있어
p.75
그러면서 나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지만 쭉 모른 척해온 것, 그러니까 동거를 이어가는 우리가 실은 부부로서 합깨하는 아름다운 삶을 내심 꿈꾸고 있으며,. 단지 그 형태가 꼭 마음에 들 정도로 그럴 듯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걸. 그러면서도 서로의 미감이 비숫하다는 데서만큼은 위안을 받고 있다는 걸 떠올린다.
때로 아름디움이란 좋은 것의 집합이다. 누구나 가지긴 어려울 정도로 비싸고 세련된 우아한 무언가다. 배제하고 엄선해낸 결과다. 그 사실을 수긍하기까지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이제 나는 동거인과 함께 그런 아름다움을 지향점으로 둔다. 거기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래야 나아갈 수 있으니까. 내 할머니의 손녀답게 말해보자면, 어쩌면 아름다움은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아름다움이란 그리움이다.
#반대로 나는 나와 다른 배우자의 미감에서 불만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하나를 골라도 고심하는 나와 달리 한 브랜드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기는 배우자의 입장을 존중하지만 내심 불만이다. 우리가 같이 나아가는 방향에 미적인 감각에 대한 동의는 없다. 다만 삶을 성실히 사는 자세, 일을 진중히 대하는 자세만큼은 닮아있다. 우리가 같이 속해 있는 세상은 '성실'이라는 껍질이다.
냉장고라는 은유
p.84 그러나 고백하자면 큰일보다도 작은 일들이 나를 휠씬 더 괴롭혔다.
여름 내내 나는 출판사나 변호사를 제외하고도 하자점검과 인테리어 입체, 부동산 중개사, 약속 부모님 등 세상 사람 모두와 통화했다. 그 시간이 내 나름의 업무시간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동거인이 아닌 내게 전화를 했다. 동거인은 회사에 있었고 나는 아니니까. 삶을 이어가기 위해 드는 자잘한 집안일은 내가 처리했다. 동거인은 회사에 있었고 나는 아니니까. 너저분한 집을 급히 치우고 자리에 앉으면 곧바로 집중을 깨뜨리는 전화가 이어졌다. 내버려둘 수는 없고 누군가는 처리해야 하는, 그런 일들이 물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나를 방해했다. 집안이 돌아가는 데에는 중요하지만 커리어와 무관한 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드는 품에 비해 좀처럼 티 나지 않는 일, 해봐야 고만고만해 보이고 내세우기도 뭐한 일들이…
확실히, 동거인은 비교적 그런 일들로 삶을 갉아먹히지 않았다. 어쩌면 기질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었다. 이것저것 죄 신경 쓰는 나와 달리 동거인은 자기 선과 의견이 명확했으며 그 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불원요하다 싶은 일들은 어지간해서 그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다만 동거인에게는 쉬이 무르거나 상헤버리는 음식 같은 구석 또한 있었다. 필요하다 생각한 것들이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예민한 동거인의 어딘가는 상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가령 깔끔한 그는 내게 청소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집이 어수선하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와 함께 사는 집의 풍경이 그를 으깨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 가라앉거나 구겨진 그 표정은 동거인의 회사일이 고된 날에 더 도드라졌다. 동거인이 상하지 않으려면 그외는 달리 그런 걸 내버려둘 수 없는 성격인 누군가가 매일 일정 시간을 집안일에 써야 했다. 자신이 일해야 하는 시간을 어떻게든 쪼개가면서.
평소 나는 동거인의 유능을 좋아했다. 그런 건 지금의 내게 없는 것이었다.(중략) 한편 동거인의 유능은 그가 상하지 않도록 품어주는 내 성향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 구석은 동거인에게 없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서로의 없음을 메꿔주면서 각자가 더 잘하는 걸 하는 게 맞다고 여겼다. 그 결과를 우리의 것이라 여기는 게 함께하는 삶에 더 이익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무능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p.88
그리고 더운 날 냉장고 문을 여단는 것처럼. 툭하면 나를 여닫는 상황들 속에서 나는 적정한 온도로 작업하는데 자주 실패했고내내 품어온 문장들을 상한 반찬을 버리듯 버렸다. 벌 수 없이 원고 마감 일정을 조절하고 글쓰기를 미뤄두고 일을 처리하는 동안 출퇴근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중요한 시기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스스로의 신통찮음이 괴롭다가도. 어떻게든 해낸 결과물이 신통찮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누군가 내 글과 나를잊올까 봐 두려웠고, 누구라도 내게 글을 요구할까 봐 두려웠으며, 써내봤자 가계에 별 도움이 못 된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깨어 있는 내내 쉬는 시간 없이 쓰고 읽고 걷고 집안을 치우고 전화를 받았다. 큰일을. 거기 수반되는 자잘한 일들을 자기 몫인 양 처리하며 동거인이 상하지 않고 유능하도록 애썼다. 그러느라 자신의 일을 자꾸만 뒤로 미뤘다.
거기에는 상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대고야마는 나의 기질이나 현실적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외에도 그런 식으로 효능감을 느끼려는, 나 자신의 무능을 회피해보려는 악순환의 고리 또한존재해왔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런 게 그 어떤 큰일보다도 나를 방해해왔다는 것도. 나는 늘나의 유능에 가장 관심이 있었고 나의 무능이 가장 두려웠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어라도 고장 나기 충분할 정도로 사시사철 켜져 있었다.
# 육아를 하며 내가 느꼈던 감정과 가장 닮아있는 챕터였다.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이북 리더기를 샀다. 아직 모유수유에 집착하던 나는 새벽에 일어나 유축을 하던 시기였다. 한없이 들었던 유축기의 반복적인 리듬이 내 삶의 전부였는데 남편의 세계는 이북 리더기에 가있었다.
남편의 성실한 회사 생활을 위해 수많은 저녁을 아이와 둘이 함께 보냈다. 남편이 골프를 배우고, 석사를 따고, 승진을 하는 동안 나에게 남은 건 저절로 자란듯한 아이의 성장과 쭈그러진 몸이었다. '나는 늘나의 유능에 가장 관심이 있었고 나의 무능이 가장 두려웠다'라는 단어가 매우 와닿았다.
아이를 낳고 난 후 나는 아이보다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은 바뀔 수 없는 현실에 허망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나의 무능함이 두려워 때때로 한없이 가라 앉는다.
한 뼘의 자리
p.105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 대학 시절 주변의 친구들의 형편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안도감은 불행의 서막이었다. 자극 없이 졸업을 하고 맞이한 사회는 너무나 달랐다. 잘 몰라도 주어진 걸 해냈더니 가진 걸 누리는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내가 한없이 욕심내야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이 당연한 사람. 어릴 적 배워서 더 많은 걸 배운 사람. 그 간극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젖소와 여자들
p. 164 한편으로는 어제 읽은 정혜신 선생님의 책이 떠올랐다. 그는 세월호와 그 주변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을 언급하며,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희생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죄의식을 나눠가진다고 했다. 그 죽음에 뭐라도 했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죽음에 정말로 책임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거라고 했다. 그런 죄책감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에 심리적 유대감을 갖는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거였다.
# 나와 한 걸음 떨어진 슬픔에 많은 공감을 느낀다. 안타까운 죽음에 애타는 건 결국 그들의 삶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책임은 저 멀리에도 있다.
쓰잘데기 없는 예체능
p.197 삶에 무엇을 중심으로 두는지는 세상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 방식에 무엇이 맞고 틀린지는 점점 더 모르겠다. 단지 내게는 선호와 불호가 있으며 불행하게도 숫자 같이 유용한 것으로 세상을 보는 게 내가 선호하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돈을 좀 만지며 살 텐데. 아쉽지만 그렇다 해도 나로서는 내 호불호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고 내 막내 삼촌 또한 그럴 것이다.
#나는 숫자가 너무 어렵다. 회사를 다닐 때 몇 번을 보고 기안을 올려도 내가 적은 숫자에 오류가 있곤 했다. 내겐 세상이 숫자로 보이지 않는다. 눈빛과 행동이 먼저 보인다. 이는 참 돈과 연결되지 않는다. 한 때는 그러한 나의 모습에 무용함을 느꼈다. 그래도 내가 가치있게 두는 것에 유용함을 두려해본다.
▶책을 읽은 후 나에게 남은 것
에세이를 읽을 때면 이 사람이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인지, 실제로 내 주변에 있다면 어느 정도의 친분을 느낄지 상상해 보곤 한다. 임지은 작가는 공감하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사실 나와 같은 결의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보다는 좀 더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 같았다.
책을 읽으며 지금까지의 내 기준과 반하는 사회와 사람을 마주하며 느낀 괴리감에 공감했다. 나 또한 그 간극 사이에서 불만을 느끼며 살고 있으며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불만은 최근 몇 년간 내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책을 읽으며 좀 더 가시화되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나를 움직이게 만든 건 결핍이라 생각했다. 여기에 덧붙여 책 속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내가 가고 싶은 세상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또한 나를 움직이게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차피 삶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인데 나의 원가족이 그 환경을 선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항상 부족함과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내가 불편한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을 통해 나를 발견할 때가 많다. 최근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면 무슨 이유로 내가 부정적인 마음에 무게가 쏠리는지 시간을 내어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에는 나의 열등감이 들어있기도 하고 나의 불안함이 묻어있기도 하다.
시간을 들여 둘쭉날쭉한 나의 감정을 다스리며 균형을 맞춰나가고 있다. 온전히 나로서 살아온 시간과 자식으로서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비슷해지니 물리적 시간 덕분에라도 점점 더 나다운 삶에 가까워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책이었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
- 주변에 불만이 쌓인 사람
- 내가 가진 것을 부정하는 마음이 어디서 오는 건지 모호한 사람
-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통해 나를 더 알아보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