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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숲 Mar 08. 2023

바다의 맛_멸치

4월의 대변항은 펄떡이는 멸치 비늘로 번쩍인다. 늘어선 배들마다 그물 후리는 소리가 반복되고 노란 우비를 입은 어부들의 힘찬 팔 힘이 멸치를 털어낸다. 봄햇살에 반짝이는 멸치는 허공을 날아 그물 아래로 쏟아지고 더러는 홀린 듯 지켜보는 구경꾼들 발아래로 툭툭 떨어지기도 한다. 넘치듯 담긴 멸치들이 상자째 실려 옮겨지고 항을 마주보고 늘어선 가게들 앞으로는 즉석에서 절여주는 멸치젓갈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제철 맞은 멸치들은 맛도 그만. 식당들마다 다양한 멸치요리 한상이 펼쳐진다. 멸치조림이나 찌개는 기본, 멸치구이나 튀김은 별미이고, 멸치 배를 갈라 뼈와 내장을 제거하고 손질한 싱싱한 회가 압권이다. 기름이 올라 고소한 제철 멸치의 감칠맛이 같이 무친 채소들과 함께 달큰하게 올라온다. 대변항의 멸치는 10cm가 넘는 길이의 크고 굵은 대멸이라 한 입 가득 들어차는 멸치 육질을 즐기는 맛 또한 있다.      


멸치회를 처음 먹었을 때는 두려움이 있었다. 저 시커멓고 커다란 멸치를 생으로 먹으면 비리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미나리, 깻잎 등 신선한 채소의 풋내와 새콤달콤고소한 초고추장 양념맛이 어우러진 멸치회의 맛을 본 이후로는 봄이면 대변항이 떠오르고 입안에 살짝 침이 고인다. 몰라서 못 먹었지 알고 나면 잊지 못하니, 입맛이란 참 간사하고도 정직한 게 맞다. 이제는 아예 기장 시장에 들러 잘 손질된 멸치를 사다가 내 입맛에 맞게 갖은 채소와 양념을 하여 넉넉하게 무쳐 배부르게 먹기도 한다. 처음에는 비린내가 두려워 알려진 요령대로 막걸리에 잘 담가두었다가 무치기도 했었는데, 갓 손질한 싱싱한 멸치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맛있기만 하다.     


봄이면 대변항의 생멸치에 한창 홀리기도 하지만, 사실 멸치는 일 년 사시사철 한국인의 밥상을 떠나지 않는 식재료이다. 국이나 찌개를 끓이려고 하면 누구나 찬물에 멸치부터 몇 마리 넣고 보니 말이다. 어느 집 주방에나 당연한 듯 상비되어 있는 식재료, 마른 멸치. 끼니마다 먹는 국과 찌개에 멸치 육수를 안 내는 경우가 거의 없고, 가장 흔하게 먹는 반찬 하면 멸치볶음을 떠올리기 마련이니,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생선은 분명 멸치일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 멸치볶음은 만만한 듯 참 어려운 반찬이었다. 멸치 크기에 따라 먹는 즐거움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잔멸치가 가장 만만했다. 생선 한 마리를 먹는다는 느낌 없이 바삭하고 고소한 맛으로 쉽게 집어 먹을 수 있는 반찬이었으니까. 하지만 멸치 크기가 커질수록 어른에 가까워지는 맛이랄까. 멸치도 생선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고 보면 아무리 맛있게 볶아놓아도 그건 그저 어른용 반찬일 뿐이었다. 육수에 넣어도 될 만한 커다란 멸치로 만든 멸치볶음은 당연한 듯 어른들 앞으로 밀어놓았고 그 큰 멸치를 맛있게 먹는 어른들을 보며 저런 게 어른의 맛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멸치향이 진하게 우러난 국이나 찌개도 쉽지 않아서 아빠 입맛에 맞추어 멸치육수를 진하게 우려내 끓인 찌개가 나오는 날은 먹기가 고역이었다. 특히 멸치를 잔뜩 넣어 끓여내던 엄마표 김치국밥은 엄마의 별미 음식이었지만 어린 나에겐 그저 어른의 맛이기만 했다. 


그런 나도 어른이 되고 보니 된장찌개를 끓이려면 멸치부터 한 움큼 찬물에 집어넣고, 진한 멸치육수를 부은 잔치국수를 맛있다고 찾는다. 게다가 마른 멸치가 아닌 생멸치를 찾아서 먹는 걸 보면 세월이 가르쳐주는 음식의 맛은 참 넓고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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