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생의 첫 수업
뉴욕으로 넘어오기 전, 아주 짧게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속성 과외를 받았지만,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학교 수업을 시작하기 전 걱정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테크닉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디자인에 대해서 딱히 아는 것도 없는 비전공생이었고 더불어 컴퓨터 다루는 실력 또한 형편없었다. 고등학교 때, 다른 과목은 1-2등급의 내신 성적을 받아도 컴퓨터는 잘 받아야 7등급이었다. 이런 내가 디자인을 하겠다고 여기까지 왔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다.
뉴욕에 도착한 지 2주 만에 2학년 첫 학기는 시작이 되었고, 제일 중요한 그래픽 디자인 전공 수업의 첫날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새로웠다. 학교 건물은 city campus의 형태로 전공별 건물이 맨하탄 미드타운 이스트와 웨스트에 위치해 있었다. 미드에서 많이 보던 푸르른 잔디와 역사적인 건물의 캠퍼스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워서 좋았다. 내가 꿈꾸던 그 도시 뉴욕에 내가 있었고,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디자인 수업을 듣는다니. 길에서 개똥을 밟아도 좋다고 웃어넘길 나였다.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들어간 교실에는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The Weeknd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교실은 디자인 스쿨답게 iMac 30대 정도가 책상, 의자와 함께 배치되어 있었고, 교실 안 모든 소품들이 마치 현대미술관 갤러리에 전시된 일련의 작품 같았다. 교실 중앙에서 교수님이 음악을 선곡하며 자유롭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내가 기대하던 힙한 아트스쿨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런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아트와 디자인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전공수업이 시작됐고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소개에는 왜 디자인을 선택했는지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맛을 꼭 추가하라고 했다. 아트스쿨답게 참 희한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교수님은 수업 커리큘럼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하고 첫 과제를 내주었다. 과제라는 단어 하나에 바로 긴장을 했다. 1년 동안 열심히 만들었던 포트폴리오 작업은 디자인 작업이 아닌 순수미술 작업이었기에 이번에는 또 다른 고행의 시작임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첫 과제는 바로 저명한 그래픽 디자이너 폴 랜드의 14가지 디자인 생각에 대해서 시각적으로 표현해오라는 것이었다. 14가지 디자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 space
- contrast
- proportion
- harmony
- rhythm
- repetition
- line
- mass
- shape
- color
- weight
- volume
- value
- texture
당연히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 하는 과제 일 줄 알았는데, 손을 사용해서 완성해도 된다고 교수님이 설명을 해주셨다. 14개의 네모가 그려진 종이를 받았고, 각 네모 안에 폴 랜드의 14가지 디자인 생각을 시각화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사용할 수 있는 재료에는 제한이 없었다. 과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생각보다 쉽네?'라는 멍청하고도 안일한 생각과 함께 교실 밖으로 나섰다.
일주일이 지났고, 당장 내일까지 과제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간단한 과제였기 때문에 전날 시작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여유롭게 검은색 마커로 이런저런 패턴을 그리며 14개의 네모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크게 막히는 부분도 없었다. 다음날 완성된 과제를 들고 호기롭게 학교로 길을 나섰다. 내가 완성한 과제에 대한 자신감과 뿌듯함을 느끼며 교실에 도착하는 순간, 그 자신감과 뿌듯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교실에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패턴으로 만들어진 입체적인 형상의 과제가 벽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교수님은 각자 완성한 과제는 교실 벽에 붙이라고 했고, 학생들은 저마다 과제를 벽에 붙이고 있었다. 한없이 초라한 내 과제가 부끄러워 누구에게 보여주기도 싫었지만, 벽의 한 구석을 찾아 꾸역꾸역 붙이기 시작했다.
교수님과 친구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