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뷰 / 우신영 장편소설
특정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삼을 때 많은 작가들은 도시의 이름을 이니셜로 처리하거나 아예 가상의 도시를 창조하곤 한다. 현실의 개입을 줄이고 상징성을 강화하려는 문학적 선택이다. 그러나 시티뷰에서 우신영 작가는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그는 ‘송도’라는 실제 도시의 이름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더 나아가, ‘국제도시’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개발의 궤적과 그 속에 스며든 욕망과 위선을 숨김없이 펼쳐 보인다.
송도는 없던 땅이다. 조용하던 갯벌에 끝없이 모래를 퍼올려 땅을 만든 곳. 존재하지 않던 공간을 계획과 자본, 국가적 의지로 떠올려 현실로 만들어낸 도시. 이곳은 ‘있던 것’을 지우고 ‘심어야 할 것’을 앞세우는 장소다. 송도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들은 너무 미미해서 쉽게 사라졌고 그 자리는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의 새 서사가 순식간에 점령한다. 시티뷰 속의 송도는 기억마저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도시다. 기억할 것만 기억하고 불편한 진실은 반짝이는 유리창 너머로 밀어낸다.
이야기는 이 도시의 성격을 오롯이 닮은 인물들로 이어진다. 수미와 석진은 그 대표다. 그들은 송도의 욕망과 질감, 속도와 목적에 부합하는 인물들이다. 도시가 제시한 성공의 서사를 따라 올라와 이제는 그 질서를 굳건히 지키고 유지하는 사람들로 이들은 외려 도시 그 자체로 기능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유화와 그의 남편이 있다. 이들은 송도의 반짝임과 어울리지 않는 얼굴들이다. 존재하지만 투명한 사람들, 체계 밖의 존재들. 유화는 도시인들의 식사로 열풍을 일으킨 요거트 공장에서 일하고 유화의 남편은 고층건물의 유리창을 닦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다. 둘 다 도시를 품위 있게 유지하는 일을 하지만 그 스스로는 그 품위 속에 포함되지 못한다.
이 두 세계는 병원이라는 나름 중립적인 공간에서 섭식장애라는 가장 개인적인 몸의 경계를 두고 충돌한다. 면도칼을 삼켜 병원에 온 유화와 그를 치료해야 하는 석진의 만남. 기이하고 불편한 이 대면을 통해 석진은 자신의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구조, 송도라는 도시의 서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상처 위에 세워졌는지를 비로소 의식한다. 그가 살아온 삶은 누군가에게서 도려낸 삶이었고 그 잃어버린 자리에는 유화처럼 목소리 없이 쓰러져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시티뷰’라는 제목은 언뜻 보기에는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뜻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우신영 작가는 풍경을 보는 이의 자리에서 시선을 거두어, 풍경을 ‘만든’ 이들의 얼굴을 보게 한다. 그 얼굴은 고층 유리창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려다보는 자가 아니라, 그 유리를 닦으며 삶을 버텨내는 자의 눈동자 속에 있다. 작가에게 송도란 무엇을 이뤄낸 공간이 아니라 무엇을 외면했는지를 드러내는 공간이다.
도시는 성장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중심에 석진이 있다. 동시에 반대편 가장자리에는 유화가 있다. 하나는 보이고, 하나는 보이지 않는다. 시티뷰는 이 두 인물을 나란히 놓으며 독자에게 조용히 당신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느냐 묻는다. 견고한 도시, 완벽하게 설계된 구조물, 그 속에서 기어이 말라가는 하나의 생을 바라보는 일. 이 소설은 도시의 풍경이 아닌 그 아래 묻힌 인간의 서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무게와 그들의 소리 없는 추락을 애써 외면해 온 우리의 시선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는다.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는 진짜 '뷰', '시티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