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 정밀한 아름다움
무인도에 책 한 권만 가져가야 한다면 어떤 책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오랫동안 답을 하지 못했다. 무인도에 갇혀 있으며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고,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런데 찾은 것 같다.
무인도에 갈 때 가져가고 싶은 책 한 권 : 구병모 작가의 상아의 문으로
이 소설은 단순히 올해 읽은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로는 부족하다. 이제껏 읽은 많은 이야기들을 통틀어서 이보다 더 아름답고 더 깊은 만족을 준 이야기가 있었는가 싶다. 이 이야기는 언어와 사유의 경계를 동시에 시험하는 -다시 한번 말해야겠다 - 아름다운 이야기다.
2021년에 출간된 이 이야기는 소위 말하는 히트작이라거나 대형 베스트셀러라거나 하는 작품은 아니다. 읽고 나면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 소설은 독자를 가르고 시험한다.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지는 문장들, 한 페이지를 다 채워도 마침표 하나 보이지 않는 긴 호흡, 질서와 완결을 향하지 않고 한 없이 늘어져있는 만연체, 독자를 계속해서 밀어내는 느리고 무거운 진행 등 문학적 인내심을 요구하는 많은 장치들로 인해 독자들이 이 소설을 편히 즐기며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바로 그 색다른 형식과 긴 문장에 매료되었고 누군가 이 소설을 좋아한다면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정말이지, 단 한 문장을 책장을 넘어가도록 이어갈 수 있는 구병모 작가님의 필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난해한 문장 속에서 많은 독자들이 길을 잃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건이 전개된다기보다는 사유가 부유한다. 이야기 전체의 느낌이 둥둥 떠다닌다. 앞뒤의 논리적 질서가 사라지고 이미지와 생각이 질서 없이 떠올라 서로 맞부딪히며 원을 그린다. 진행이라기보다는 정체, 직선이라기보다는 회전, 움직임이라기보다는 고요에 가까운 흐름이 전체 이야기를 지배한다. 독자는 그 지루하리만치 느린 진행을 끝까지 응시하지 않는 한 서서히 달라지는 리듬을 감지하기 조차 어렵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17페이지에 이르러 진여가 자신의 상태를 환각이라는 단 두 글자로 요약당하며 분노하는 대목에 이르러 알게 되었다. 작가는 주인공 진여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이야기가 아니라 글자 자체와 호흡의 방향 전환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를 통해 인물의 내면이 재현되고 있었고 서술의 긴 나열이 인물 자체의 혼란스러움을 시각화하고 있었다. 설명과 묘사가 아닌, 문장의 모양 그 자체가 주인공의 정신적 상태이며 시각화된 의식의 지도였다.
어떻게 이런 소설이 가능할까. 질서 없는 언어가 이토록 정밀하게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17페이지 : 진여가 다른 케이스에 대해 묻자 의사는 환자 개개인의 차트에 해당하는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하여간 환자분께서 겪는 환각은 매우 점잖은 축에 속한다고만 말해주고, 진여는 자신이 겪는 일들이 그의 입에서 환각이라는 단 두 글자로 요약된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면 자신이 매우 잘못된 사람인 것 같고 이거야말로 정신의학과에서 임상의 대상으로 삼고 싶어 할 만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되도록 절망으로 바꿔 느껴보려고 하지만, 곧 분노와 절망은 생이라는 한 개의 점을 공유하는 예각의 관계에 불과하다고 느끼기에 이른다.
상아의 문으로는 무질서하다. 유용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으며 산만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질서 속에서 자유가 탄생한다. 이 자유로움이야말로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했다. 상아의 문은 마치 엔트로피의 극점에 다다른 세계와 같다. 모든 것이 흩어져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을 때 그 순간에서 말로 담을 수 없는 질서가 태어난다. 질서 없는 아름다움, 무질서의 가장 정밀한 형식.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준 세계였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기에 이 감동을 끝내 언어로 옮기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한다. 플롯의 유용성, 의미의 단정함, 결말의 확실성을 모두 거부한 상아의 문은 그렇기 때문에 무인도에 갇혀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고 몇 번을 읽어도 다시 읽고 싶어질것 같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토록 정밀한 무질서한 형식이라니...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