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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 브로크 / 진저 개프니 ; 허형은 번

곁을 허락하는 한 발

by 저나뮤나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단순했다. 표지에 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병오년 말의 해라는데, 말에 관한 책 한 권쯤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구잡이로 고른 책치고는 꽤 잘 집어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어증을 겪었던 작가는 성인이 되어 말 훈련사가 된다. 그녀가 말과 함께 배우게 된 것은 기술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관계와 태도였다. 숨기지 않고, 속이지 않는 말의 신호를 숨기지 않고, 속이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방식. 그 방식으로 주고받는 소통가운데 이어지는 관계에서 신뢰가 조금씩 쌓여가고 믿음이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 관계는 놀랍게도 유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는 한 말 목장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는다. 이 목장은 일반적인 목장이 아니다. 일정 조건을 갖춘 재소자들이 감옥 대신 이곳에서 말을 돌보고 행정 업무를 맡으며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장소다. 말과 사람 모두가 '유지'가 아니라 '회복'을 요구받는 공간이다.


책은 태어나 이런 말들은 처음 본다는 작가의 경악에 가까운 서술로로 시작된다. 재소자들이 경영하는 말 목장의 말들은 사람을 공격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무리를 지어 주변을 위협한다. 들개들의 행동에서나 볼 법한 행동 패턴이 목장 안의 말들에서 보여딘다. 작가는 말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버겁다. 아연실색하여 눈 앞에 펼쳐진 이미 너무 망가져버린 말의 상태를 살필 뿐이다.


전문 지식 없이 말을 다루던 재소자들은 결국 한계를 깨닫고 전문가인 작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책은 말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 다시 무너지는 순간을 숨기지 않는다. 회복은 직선이 아니고, 바닥을 한 번 찍고 나면 다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사실을 작가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절망의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희망의 흔적들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 담담하게 기록된다.


이 글은 메모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고,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계산된 글이라기보다는 일기처럼 써 내려간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구성은 느슨하고, 서사는 때로 산만하다. 탄탄하거나 쫀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완성되지 않은 느낌, 아마추어적인 결이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이 책은 따뜻해진다.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힘은 세련된 구조가 아니라, 다듬어지지 않은 진심에 있다. 이야기가 잘 짜여 있어서가 아니라, 멈칫거리며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어와 단절된 세계에서 살아온 성소수자인 작가의 삶은, 사회로부터 단절된 약물중독자이자 범죄자인 재소자들의 세계와 말 목장에서 만난다. 스스로에게조차 희망을 품지 않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점점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무엇이 세계와 사람을 단절시키는가.
무엇이 단절된 영혼을 다시 세계로 불러들이는가.
세계는 본래 따뜻한 곳일까, 아니면 차가운 곳일까.
믿을 만한 곳일까, 배신으로 가득한 곳일까.
외면하면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일까, 참여하면 바꿀 수 있는 곳일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어느 한쪽에 있지 않다.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진 세계는 없고, 한때 고정된 것처럼 보였던 축도 시간과 함께 이동한다. 세상은 흑과 백 사이에 펼쳐진 수많은 스펙트럼에 가깝다. 그래서 단정하기 어렵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문제는 답이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전제한 질문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황에 따라 세계는 따뜻해지기도 하고, 차가워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날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지만, 또 어떤 날은 누군가를 밀어내며 애써 외면한다. 힘이 닿을 때는 손을 내밀고, 닿지 않을 때는 물러선다.


하프 브로크는 그 흔들림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안정함 속에서 관계는 이어지고, 신뢰는 다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말과 인간, 상처 입은 존재와 또 다른 상처 입은 존재가 서로를 길들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심스럽게 곁을 허락하는 이야기다.


이 책은 완벽한 회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세계 쪽으로 한 발을 내딛을 가능성만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작고 느린지까지도 포함해서, 이 책은 끝까지 정직하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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