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니였지...
- 엄마가 어딨어. 아버지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
아빠는 아빠대신 굳이 한 글자만큼 떨어져 있는 아버지라는 단어로 자신을 지칭했다.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내 친할아버지는 아빠가 세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아이 셋의 - 어머니보다는 가까운 그렇지만 엄마는 아닌 - 엄니가 되었다고 했다.
엄니와 함께 살아낸 아빠의 세월은 쉽지 않았다. 초등학생이 매일 6km를 걸어서 학교를 가야 했단다. 그러니 꼬마 아빠는 왕복 12km를 매일같이 걸은 것이다. 그저 학교를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매일 같이 걸었다고 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매일 가면서 6km, 오면서 6km를 걸었다고 했다.
- 아빠 체력은 그때 다 길러진 것 같아.
옛이야기에 아득히 빠져들던 아빠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아빠 체력은"으로 짧게 시작한 문장은 긴 이야기를 품고 "그래서 괜찮다"로 끝을 맺었다.
불러보지 못한 아빠와 끝내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한 엄니를 가진 아빠는 나에게도 아빠가 되는 것을 어려워했다. 한사코 아버지였고, 아버지로서 책임을 지는 일에 질문하지 않았다. 왕복 12 km를 매일 걷던 꼬마처럼 매일매일 아버지의 책임을 다했다.
- 나는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너희들이 다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하게 물려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미안하다.
이제는 아버지의 책임을 내려놔도 누구도 뭐라 하질 않을 나이가 된 아빠였지만 아빠는 내 앞에서 미안해하고 있었다.
- 너희들이 잘 살아줬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바라는 게 있다면 그런 거야.
다시 한 글자만큼 물러선 아빠가 사십 대 중반을 넘긴 딸을 바라봤다. 딸과 나누는 이런 대화가 멋쩍은 듯 아빠는 엄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도 한번 말해봐.
+
여수의 어디 매에서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 칭하는 아빠에게 물었던 것이다.
- 아빠, 은퇴도 하시고, 어떠세요? 인생의 마지막 챕터는 어떻게 써내려 가고 싶으신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부드럽게 발화되었다.
아빠는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하더니 놀라움이 담긴 눈을 떴다.
-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아버지로만 살았던 우리 아빠는 우리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로 당신의 마지막 챕터 얘기를 마치고는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는 천천히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았다.
- 윤재 아빠 덕에 잘 살았어요. 나도 이하동문이요. 쟤들 잘살면 돼요.
아빠는 나를 다시 바라봤다.
- 그래. 엄마도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야.
살짝 흐렸던 여수 하늘 밑에서 아빠는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