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 포스티노> 리뷰
‘은유로 사랑과 우정을 만들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이런 허황돼 보이는 말을 2시간짜리 필름에 담아낸 영화가 있다. 시인과 우편배달부의 우정을, 그리고 은유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 인물의 성장을 그린 영화 <일 포스티노>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 주변에 놓인 것들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와 은유가 그 안에서 매개체로 작용한다. 유별나고 화려한 표현 없이도 주변에 있는 것들을 보고 느낀 자신만의 감상이 있다면 그것이 시가 될 수 있다. 이 영화 역시 평범한 인물이 주변에 놓인 사람, 상황, 환경을 사랑해가는 모습을 시적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또다시 자신의 감상으로 내놓은 시, 황지우의 「일 포스티노」가 있다. 먼저, 네루다에게 메세지를 남기던 마리오의 음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시를 감상하며 칼라 디소토의 바닷바람을 느껴보자.
일 포스티노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태동(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 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 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때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신촌역(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시를 감상하다 보면 자전거를 두고 문 앞에 서성이는 마리오의 어눌한 목소리, 섬의 아름다움을 묻자 ‘베아트리체 루소’를 읊조리던 수줍은 얼굴, 우상을 생각하며 풍경의 소리를 담아내던 뒷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시에서 전해지는 마리오의 잔상이 영화 속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 처음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접근하게 된 것은 그다지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네루다가 사랑에 관한 시를 잘 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 직장도 없던 마리오는 네루다와 친분을 쌓아 인기를 얻기 위해 취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네루다에게 우편을 배달하면서 그와 친해지기 위해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한다. 네루다는 귀찮아하는 듯 보여도 마리오의 질문에 답해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마리오는 네루다와의 대화를 통해 더 이상 불순한 마음이 아닌 진정한 존경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형성되어 가는 둘의 관계성에서 주목할 것은 ‘우편배달부’라는 마리오의 직업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편이라는 것이 옛날의 문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지금은 우편처럼 일주일이 넘게 걸려 전달받지 않아도 전화, 문자, 전자우편(E-mail), SNS 등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너무나 많아졌다. 사실 우편은 여러 면에서 미련한 구석이 많다. 일단 고작 몇 줄 적어 보내는 데에도 며칠이 걸리고, 그마저도 언제 올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게 만들며, 신기하게도 자리를 비울 때만 불쑥 찾아온다. 심지어 받고 싶지 않아도 받을 수밖에 없다. 끝끝내 수신인에게 전달되고야 만다. 하지만 이렇게 답답해 보이는 우편은 보낸 사람의 꾹꾹 눌러쓴 글씨와 고민한 듯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종이 한 장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과 기어코 손에 쥐어졌을 때의 설렘은 그 어떤 소통 수단과도 비교할 수 없다.
매일같이 우체통을 확인하고 서로의 소식을 기다리던 일은 이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영화 <일 포스티노>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편배달부로서 마리오의 모습을 아주 순수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리오와 네루다의 관계 역시 이 우편을 통해 시작된다. 아마 마리오가 우편배달부가 아니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일 포스티노>를 보고 있으면 오늘날에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우편배달부 자전거의 따르릉 소리, 우편이 도착했다며 문 뒤에서 외치는 우렁찬 소리가 곧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인이던 파블로 네루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나라에서 추방되어 마리오가 사는 섬마을에 망명 오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오 역시 네루다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발을 들이게 된다. 네루다가 다시 칠레로 돌아간 뒤에, 섬마을에도 선거가 다가오고 민주당에 속한 후보가 작년에도 지키지 않았던 수도 공사 공약을 내걸며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시작한다. 심지어 베아트리체는 그 말을 굳게 믿고 공사 인부들의 식사를 대접하다가 주점 상황이 어려워지고 만다. 이 상황에서도 마리오는 네루다를 떠올리며 만약 그가 마을에 남아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끝내 네루다의 정치적 성향을 이어받아 공산주의자가 되고 공산주의 시위에서 네루다에게 바치는 자신의 첫 시를 낭송하려다 폭력진압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마리오가 죽은 뒤, 네루다가 홀로 다시 섬을 찾았을 때 해변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리오가 자신을 위해 섬의 아름다움을 찾아 파도 소리, 별들의 소리를 녹음한 것을 들었을 때, 그리고 공산주의 집회에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시’를 낭송하려다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네루다는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회한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마리오가 네루다를 만나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한다. 마리오는 결국 남들 앞에서 자신의 시 한 소절도 읊어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지만, 우상인 네루다의 마음속에는 아주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영화 안에서 마리오는 다채롭게 그려진다. 직업도 없던 그가 우편배달부가 되어 편지를 전하고 그걸 보는 관객들은 그들이 언젠가 주고받았던 마음을 회상하게 한다. 남의 시를 베낄 줄만 알았던 그가 점점 자신의 인생을 은유로 채워가는 모습을 보며 관객 모두가 은유를 통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일 포스티노>는 마리오가 주변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그물 소리를 느꼈던 것처럼 곁에 늘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