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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Mar 08. 2020

누군가의 손을 붙잡을 용기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잠 못 드는 밤, 비가 내리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하얀 얼굴에 까만 머리칼, 무표정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

러시아 병실 메이트 레나. 그의 첫인상은 쎈 언니였다.

 

베로니카가 뚝배기에 팔팔 끓는 국밥 같은 사람이었다면,

레나는 스테인리스에 담긴 온국수 같은 사람이었다.

겉보기엔 차갑지만 들여다보면 따뜻한.


창가 침대자리 햇볕을 뜨거워하는 나에게 자리바꿈을 권하고,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간식을 꼭 나눠 주고,

울고 있는 나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

레나는 그런 온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깜깜한 밤,

레나는 그 날 따라 통증이 심했는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베로니카는 의사를 부르러 나갔고 레나와 나 둘만이 병실에 있었다. 꺼이꺼이 목놓아 우는 레나를 보며 마음이 저려왔다.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 사이로, 오랜 지병에 얼룩 져 혼자 울던 지난날 모습이 겹쳐졌다.

누구도 덜어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고 뎌보아도 새어 나오는 건 고독한 울음뿐이었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지겨운 굴레 속에서 어떤 희망도 기대도 없이 가라앉는 것은 슬프고 무력했다.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겠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비슷하지 않. 레나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이 없었지만, 레나가 혼자 외롭게 고통을 견디는 것은 싫었다.

그저 레나의 손을 붙잡고 같이 펑펑 울면서 의사를 데려 올 베로니카를 기다렸다.



진통제를 맞은 레나는 고통이 잦아드는 듯했다. 하지만 고통이 잦아든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레나를 위로하고 싶은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 우리 사이에 어떻게 마음을 전해야 할지 어려웠다.


레나는 병원 생활의 지루함을 달래며 종종 음악을 듣곤 했다.

무표정인 얼굴로 까딱까딱 리듬을 타다가 흥에 겨우면 한 곡조 시원하게 뽑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을 떠나기 전 챙겨 왔던 여덟 곡 중, 그날 날씨와 가장 어울리는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틀었다. 


투둑투둑 비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음악이 잔잔하게 채워졌다. 무표정이던 레나의 얼굴에 잔잔하게 음이 번졌다. 내 얼굴에도 그와 같은 표정이 번졌다.

 


혈액암 선고를 받은 허지웅은 항암치료를 받으러 입원했을 때, 그 누구도 병문안을 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아픈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고통을 견디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라고 했다.


나의 아픈 구석을 인정하는 것,

무너지는 모습을 누군가에보여주는 것,

힘들 때 붙잡아 달라 손 내미는 것,

모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럴 용기가 없어 나는 내 고통을 아무도 덜어줄 수 없는 것,

오롯이 내가 견뎌야 할 고독한 것이라 치부했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직접 덜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휑한 고독 사이를 온기로 채울 수는 있다.

   

잠 못 드는 밤, 비가 내리면 내가 멋대로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고 있던 레나의 용기가 생각난다.

고통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을 때, 레나가 읊조리던 말을 주문처럼 꺼내볼까 한다.


"볼라, 수까 (나 아파, 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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