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선 작가님의 만화 <뚜리빼> 1권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확신은 없지만 한번 해본다는 쎄쎄.
'한번 해본다'는 말풍선만 보면 마치 옆동네에 책가방 하나 메고 가는 가벼운 마음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그녀의 결심 이면에는 어금니를 꽉 깨물정도의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도 세계여행을 결심할 때 쎄쎄처럼 좆될 각오까지 필요했다. 불안이 몇 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 옆동네 가듯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지만 칼을 뽑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꿈일 수도 있는 세계여행이 나에게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두려움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응? 세계여행 그거 뭐 살면서 꼭 해야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고개가 갸우뚱할 수 있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다.
귀찮은 여행보다 방구석이 좋은 집순이가 긴 여행을 고민하게 된 것은 '제대로 된 상담심리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응? 상담심리사와 세계여행이란 연결고리에 또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다.
상담심리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을 진학하는 것은 필수지만 그 어디에도 세계여행이 필수라는 조항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상담심리사 말고 '제대로 된' 상담심리사가 되기 위해 자신이 가진 틀을 깨고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는 수풀님*의 이야기에 깊이 동감했다. (*집단상담을 하며 함께 울고 웃었던 상담 선생님)
스스로 가둔 틀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전전긍긍하며 사는 내가 그것을 깨보지 않고서 내담자와 함께 자유로워지기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의 시작은 꿈 때문이었지만, 막상 결정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세계여행이란 선택지를 고민할수록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내가 스스로 가두고 있는 틀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틀 하나, '떠나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
익숙한 한국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 그 자체가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새로움은 설레고 재밌는 것일 수도 있지만, 쫄보인 나에게 새로움은 신나는 것이 아니라 예상할 수 없어 겁 나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불만들로 툴툴대던 일상이지만 막상 그 일상들을 손에서 온전히 놓으려고 보니 꾹 잡고 싶은 소중한 것들 투성이었다. 살면서 잠수를 타본 적도, 아끼는 사람들 곁에서 혼자 오랫동안 떨어져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인지 한국에 없는 사이 달라질 상황들, 관계들 속에서 나는 잊힐까 두려웠다.
틀 둘, '통장 잔고 0원에 대한 두려움'
모아둔 돈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빈털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통장잔고가 0원이 될 때를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해질 만큼 아찔했다.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걱정이 많은 쫄보지만 유독 돈에 대한 걱정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유난스러웠다. 한번은 상담심리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때, 학비 때문에 대출 이자를 알아본 적이 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아직 빌리지도 않은 대출 이자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나에게 있는 돈을 탈탈 모아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은 전재산을 주사위 한 번에 배팅하는 도박과도 같았다.
틀 셋,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쫄보의 특징 중 하나는 선택 앞에 고민과 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선택 앞에서 주저하는 이유는 이 선택이 훗날 잘못된 선택이 되어 인생을 망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가장 많이 가는 길, 그나마 안정되어 보이는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대학-취업-결혼-출산-육아,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겠는 인생 로드맵에서 그 나이 때마다 정해진 숙제를 하지 않으면 혼자 뒤처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친구들은 사회 속에서 저마다의 커리어를 쌓고 있는데 세계여행을 다녀와서 다시 취업이나 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틀 넷, '건강에 대한 두려움'
아토피 피부염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주변 환경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어찌 보면 살면서 여행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이유는 아토피 영향이 큰 것 같다. 수학여행을 갈 때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가서 씻는 물이 안 맞으면 어떡하지?' 였으니까.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기대되는 것이 아닌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귀찮은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것이아토피에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면서 지 몸 하나는 끔찍이도 아끼는 쫄보가 되었다. 아프면 일상이었던 생활도 더 이상 일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쓰는 물, 먹는 음식, 바르는 보습제 등 모든 것이 달라질 여행 속에서 아토피가 심해질까봐 두려웠고 그 괴로운 시간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무서웠다.
이밖에도 떠나지 못하겠는 이유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여행을 선택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이두려움을 지금 피했다가는 나중에 세계여행이 아닌 또 다른 얼굴로 마주칠 것 같았다. 그게 더 두려웠다.
사실 이 두려움은 세계여행을 선택했을 때만 느낄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 오면서 느껴왔던 두려움이고 살아 가면서 언제나 마주칠 수 있는 두려움이다. 단지 세계여행이 그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환경일 뿐. 나는 살면서 그 두려움들을 계속 계속 마주치는 것이 더 두려웠다.
두려움을 잠시 피하기보다 마주해서 깨버리고 싶었다. 흔히들 여행이 도피의 수단이라고도 하지만, 나에게는 떠나버리는 것이 도피가 아니라 익숙한 이 곳에 남는 것이 안주였고 도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