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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모두의 공간, 러시아 횡단 열차

열차의 불편함은 사람 사이에 연결이 된다.

열차 탑승 이튿날,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잠이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났더니 어제는 못 봤던 러시아 꼬마 두 명이 열차에 타고 있었다.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을 때 어른보다 아이와 친해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영과 함께 꼬마들과 장난을 몇 번 쳤더니 "쁘리비엣" 하고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던 녀석들이 인사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조금 친해졌을 무렵, 미리 받아두었던 오프라인 번역기로 이름이란 단어를 찾아 물어봤다. "임야, 임야" 했더니 꼬마는 "니엣, 니엣" 하며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흥, 이런 밀당의 고수.                


그런데 욘이 와서 유창한 러시아어로 물어보자 바로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영과 나는 꼬마들이 욘을 더 좋아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욘은 번역기가 단어를 잘못 알려준 것 같다며 웃었다.



어렵게 알게 된 꼬마들의 이름은 미샤와 막심이다. 미샤와 막심은 처음엔 새침데기 같더니 친해질수록 엄청난 개구쟁이었다. 힘이 넘치는 꼬마들과 놀면서 육아의 어려움을 티저로 맛봤다.



열차의 시간은 가늠이 안된다. 위치가 달라지면서 시간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휴대폰은 지금이 몇 시인지 제대로 알려주길 포기한다. 누구의 시계는 오후 4시고 누구의 시계는 오후 3시다.



사실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지는 열차를 내릴 때가 아니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날이 밝으면 낮이겠거니 어두워지면 밤이겠거니. 열차 속 시간은 억겁의 시간처럼 느리게 흐르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내릴 시간이 빠르게 다가온다.                      



열차의 공간은 나의 공간이 아닌 모두의 공간이다. 식탁은 1층밖에 없기 때문에 2층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1층인 27번 자리는 나의 침대도 되었다가, 누군가의 의자도 되었다가, 누군가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인지 억지로 친해지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무언가를 주고받게 된다. 짐칸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려고 침대를 들어 올리자 첫날 시크하게 인사를 했던 러시아 친구가 말없이 침대를 같이 들어주는 것처럼.(심쿵)



식사를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안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바깥쪽에 앉으며 자리를 비켜준다. 누군가 2층에 올라갈 때 1층에 발을 디딜 틈을 내주기 위해 침대 끝까지 쭉 뻗고 있던 다리를 오므린다. 콘센트도 자리마다 있는 것이 아니라서 충전기를 건네고 그것을 대신 꽂아주는 것이 당연하듯 자연스럽다. 그렇게 열차의 불편함은 알게 모르게 사람 사이에 연결이 된다.



열차 속 시간과 공간을 되새기며 가장 많이 떠오르는 외국 친구들은 야나와 아크바르다. 야나는 영의 바로 윗자리, 아크바르는 나의 바로 윗자리를 썼던 2층 친구들이다.



야나는 우리가 진상 아재들로 곤란해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준 든든한 친구다. 2층 자리에 앉아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러시아어라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야나가 우리에게 쓰는 마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기차에서 내리기 전날 밤, 번역기로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아크바르는 담백한 눈빛이 인상적인 친구다. 그는 우리가 알려준 한국말을 완벽히 구사했다. "좋은 아침, 좋은 밤"을 따라 하는데 마치 한국 라디오를 듣는 것 같아서 그가 사실은 한국 사람이 아닐까 하고 잠시 의심했다.



밤늦게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언어를 나누던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이 남는다. 야나한테 배운 숫자 세는 법은 시장에서 장을 볼 때마다 잘 써먹고 있다. 아진, 뚜아, 뜨리, 취뜨리, 삐엣즈.                


야나와 아크바르와 헤어질 때 괜스레 코끝이 시큰했다. 영에게 "고거 며칠 봤다고 헤어지는 게 왜 이렇게 짠할까요?" 하고 물었다. 영은 "그 며칠을 24시간 동안  붙어 있었잖아요." 하고 말했다.


2일 22시간 동안 여러모로 정들었던 횡단 열차에서 내려 새로운 도시 이르쿠츠크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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