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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서툴러도 괜찮을 것 같아

처음이 폐가 될까 조마조마 했던 마음


영 그리고 욘과 함께 트램을 타고 이르쿠츠크 시내로 들어왔다. 트램이라는 걸 처음 타봤는데 버스도 아닌 것이 기차도 아닌 것이 전선을 달고 도로를 내달리는 게 꽤 신기했다.                          


영이 인터넷이 안 되는 날 걱정하며 호스텔 앞까지 데려다줬다. 스윗영. 호스텔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샤워다. 3일 만에 비누칠을 하고 머리를 감았더니 세상이 그렇게 맑아 보일 수가 없었다. 콧노래를 절로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이르쿠츠크 무사 안착을 기념하며 셋이서 몸보신을 하기로 했다. 몸보신에는 역시 고기. 러시아 전통 요리인 샤슬릭을 먹으러 갔다. 욘은 우리가 방문한 식당의 요리가 정통 샤슬릭은 아니라고 했다. 정통 샤슬릭은 고기를 통째로 숯불에 굽는 요리라고 하는데 우리가 먹은 요리는 고기를 갈아서 구운 소시지 느낌이었다. 하지만 열차에서 내려 먹는 첫끼는 뭘 먹든 꿀맛이었다. *부꾸스나! (*러시아어로 맛있다.)                       


슬슬 동네 구경을 하다가 카페로 들어갔다. 횡단 열차에서부터 지금까지 영과 욘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터라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커피를 샀다. 영은 안 그래도 된다며 손사래를 쳤고 욘은 잠시 고민하더니 원래 호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며 오레오 셰이크를 골랐다.(ㅋㅋㅋ)                     


영은 욘이 편해졌는지 이따금씩 장난을 쳤는데 욘도 장난이 싫지 않은지 영의 장난을 덤덤하게 받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는데 웃음이 터지면서 잔뜩 힘이 들어갔던 마음 한 구석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덩달아 편해진 나는 혼자 꽁꽁 숨겨두려 했던 화투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욘도 화투를 챙겨 왔다고. 반가운 마음에 손바닥을 마주쳤다. 알고 보니 욘은 윷놀이까지 챙겨 왔다고 한다. 리스펙트 욘! 내가 졌다.



우리는 음료를 홀짝이며 꿈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고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하기에는 막연한 각자의 이야기를 나눴다. 영은 여행 작가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욘의 이야기에 글솜씨가 없다며 수줍게 웃었다. 욘은 여행 가이드가 잘 어울린다는 영과 나의 이야기에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며 수줍게 웃었다.                     


영과 욘의 수줍음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영과 욘의 처음을 같이 나눈다는 건 꽤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처음이 둘에게 폐가 될까 혼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머쓱해졌다. 나의 서툰 여행을 둘과 함께 시작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좀 서툴러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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