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주 Nov 17. 2019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네 명의 인연과 두 번의 안녕 

그날은 네 명의 인연과 두 번의 안녕을 하는 날이었다.

첫 번째 안녕은 Eni와 Bali다. 애니와 발리는 헝가리에서 온 부부인데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누비는 중이라고 한다.      

발리는 길게 자란 턱수염이 잘 어울리는 헝가리 신사다. 웃을 때 처지는 눈꼬리가 애니와 꼭 닮았다. 그와의 첫 대화를 떠올리면 라운지 옆자리에서 코드 좀 꽂아도 되겠냐며 조심스레 묻던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그의 젠틀함이 인상적이었지만 갈수록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 발리.



애니는 사랑스러운 곱슬머리에 표정은 배우처럼 다양하고 종종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곤 한다. 코드 좀 꽂아도 되겠냐는 발리 옆에 앉아 휴대폰을 붙잡고 한참을 울던 애니.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그때는 친해지기 전이라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하루는 애니와 발리가 방에서 물건을 잔뜩 풀어놓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오며 가며 인사만 했는데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애니에게 "내일 떠나요?" 하고 물었고, 애니는 "네, 우리 내일 올혼 섬으로 떠나요!" 하고 답했다.                      



간단한 인사로 끝날 줄 알았던 대화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2시간이 흘러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던 나는 어느새 방바닥에 내려앉아 있었고 분주히 짐을 싸던 애니의 손동작은 느려지고 있었다.



애니는 새로운 문화와 사람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한글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물어보는 외국인 친구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전공에 문득 감사하며 안되는 영어로 열심히 설명을 했다.                           



내 영어가 그새 늘었을 리가 없는데 애니와는 영어실력과 상관없이 대화가 잘 통했다. 그녀는 내가 띄엄띄엄 말해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고 내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도 천천히 다시 말해주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가 쓰는 언어에 상관없이 마음이 편안했다.    



그들과 이제서야 친해진 게 아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마음에 동해 여행 사진으로 만든 엽서를 선물했다. 애니와 발리는 무척 마음에 들어 하며 엽서에 한글을 적어달라고 했다. 나는 한글로 그들은 헝가리 글자로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다음 날 아침, 부부는 100미터 밖에서도 눈에 띌 형광 주황색 커플 티셔츠를 입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자전거에 커다란 짐들을 착착 붙이는데 트랜스포머가 따로 없었다. 애니는 자전거를 구경하는 나에게 선뜻 타보겠냐고 했다. 호기심에 올라타 보았지만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아 아슬아슬했다. 애니가 자전거를 잡아줘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는데 넘어질까 봐 끄아아 소리를 지르면서도 신이 났다.



만남과 헤어짐을 기념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그들을 배웅했다. 형광 주황색 티셔츠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냉장고에는 그들이 나에게 주고 간 우유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들에겐 필요 없지만 나는 마침 사려고 했던 일용할 양식. 밀크티를 만들어 먹으며 오래도록 그들을 추억했다.

              



두 번째 안녕은 영과 욘이다. 그들이 기차를 타고 새로운 도시로 떠나기 전에 함께 식사를 했다. 호스텔에서 추천해준 Rassolnik(라솔닉)이라는 식당이었는데 이 동네에서 꽤나 유명한가 보다. 다른 곳보다는 값이 조금 나가는 곳이었지만 폭찹과 연어, 이름 모를 감자 계란 요리를 시켜서 싹 비웠다. 아참 튀김 만두도!



이르쿠츠크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올혼 섬에 먼저 다녀온 영과 욘은 바이칼 호수 풍경을 떠올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욘은 그 풍경을 보게 될 나를 위해 사진은 스포 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도 직접 봐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욘은 바이칼 이야기가 나올 때면 야구 경기장에 포수처럼 영에게 사인을 보냈다. 바이칼 풍경을 온전히 지켜주려는 그들의 귀여운 배려에 웃음이 났다.



횡단열차에서부터 여러 순간을 함께 했던 둘을 떠나보내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손에 쥐여주고 싶은데 딱히 줄 것이 없어 고민하다가 횡단열차에서 요긴하게 쓰였던 물티슈가 생각나 하나씩 샀다. 영은 떠나기 전에 나에게 고이 접은 편지를 건넸다. 뜻밖에 선물에 깜짝 놀랐다. 편지에는 그녀의 마음이 멋진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글솜씨가 없다던 그녀는 알고 보니 사람의 맘을 울리는 문장가였다.                         


헤어짐은 찰나였다. 그들이 타야 하는 트램이 왔고 나는 어서 물티슈를 건넸다.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트램을 서서히 따라가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추억을 함께 한 네 명의 인연과 안녕을 하고 나니 하루 종일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나길 바라며. 영의 편지처럼 이게 마지막 인사는 아닐 것 같다.        



이전 06화 서툴러도 괜찮을 것 같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