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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시간이 약이겠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아 어떡하지'


올혼 섬 여행의 이튿날, 시스루 샤워실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북부 투어를 가려면 호스텔 앞으로 오는 차를 타야 하는데 지금 씻지 않으면 놓칠 게 뻔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초스피드 샤워를 결심했다.        

누가 지나갈까 봐 조마조마한 맘으로 샤워실에 한 발자국 내디뎠는데 어라? 바닥이 반계단 낮은 덕분에 창문으로 머리만 빼꼼 나오는 정도였다. '쓸만한데?' 변덕스러운 마음은 하룻밤만에 호스텔에 적응 중이었다.



제시간에 맞춰 북부 투어 차량에 올라탔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작은 봉고차에는 카메라 장비를 잔뜩 챙겨 온 한 명의 여행자가 타고 있었다. 여행자들 대화 시작의 불문율인 "헬로, 웨어 아유 프롬?"으로 알게 된 그는 인도에서 온 Abhishek다.



밀크셰이크란 애칭이 잘 어울리는 압히셰이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장비가 말해주듯 사진 촬영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몇 마디를 나누던 중, 봉고차는 순식간에 처음 만난 여행자들로 꽉 채워졌다.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정적은 꽤 오래 이어졌다.



봉고차가 멈춘 곳에 내리자 눈 앞에 바이칼 호수가 펼쳐졌다. 이르쿠츠크 호스텔에서 만났던 여행자들 중에 바이칼 호수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잊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며 상상만 했던 풍경을 직접 보고 있자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압히셰이크에게 "이게 정말 호수라고?" 하며 감탄했다. 그는 '나도 믿을 수가 없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같은 봉고차에 타고 있던 중국에서 온 Yang이 압히셰이크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너희랑 같이 다녀도 될까?" 내가 어제 못했던 그 한마디를 그는 수줍게 건넸다. "당연하지!" 압히셰이크와 나는 반갑게 대답했다.



차는 또 다른 풍경을 향해 달려갔다. 울창한 숲을 지나자 바이칼 호수는 처음 보여줬던 웅장한 모습과는 달리 잔잔한 파도를 보여줬다. 물결은 잔잔했지만 호수에 파도가 인다는 것 자체가 한편으로 웅장했다.



엄청 신이 나 보이던 압히셰이크는 가방에서 셀카봉을 꺼내 셋이 같이 영상을 찍자고 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데 압히셰이크의 해맑은 표정 위로 <꽃보다 청춘> 유희열이 겹쳐 보였다.



신나게 놀다 보니 어느새 봉고차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압히셰이크와 나의 의견이 엇갈렸다. 우리는 각자 정반대의 길을 가리켰고 양은 길을 모르겠다고 했다. 길치에 방향치인 나보다는 압히셰이크의 말을 따라보기로 했다. 그의 뒤를 따라 숲 속 길을 걷는데 봉고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계속 나무들이 이어졌다. 느낌이 싸했다.



막다른 길이 나오자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 길을 잃은 것 같아"


압히셰이크는 "응, 이럴 때는 크게 소리를 질러야 해" 라며 숲 속이 왕왕 울리도록 "헬~~~프~~!!!" 하고 외쳤다.

이 친구야 그렇게 해서는 백날 질러도 못 찾아ㅜㅜ



길을 앞장서기로 했다. "이 쪽이 맞는 것 같아"

확신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올혼 섬에서 미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걸어왔던 방향과 반대로 다시 길을 걸었다. 발걸음은 침착했지만 머릿속은 온갖 잡념들로 복잡했다.

'차가 떠나버렸을까? 기사님 연락처도 모르는데.. 아참 여긴 휴대폰도 안 터지지..'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경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따라간 곳에는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향해 마구 달렸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한참을 기다렸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호수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사과를 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어.."

짜증 섞인 대답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무표정은 오히려 웃음 짓는 얼굴로 바뀌었고 우리에게 괜찮다고 했다.



해프닝이 있은 후로 차 안은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프랑스에서 온 Ludo와 Sam 그리고 이집트에서 온 Lamis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했다.

"그냥 song이라 불러, 근데 노래를 잘하진 않아"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웃는 걸 보니 오픈 마인드를 가진 친구들이 분명했다.



친구들의 호스텔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사는 변기의 유무였다.


"너희 호스텔엔 변기가 있어? 우리 호스텔엔 그냥 구멍이 있어."


라미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변기가 없다고? 우리 호스텔도 화장실이 멀긴한데 변기는 있어."


옆에서 샘웃으며 말했다.

"색다른 경험이네! 거기서 다른 사람들도 만났어?"

"아니, 거기 나밖에 없어서 적적했어."


루도는 어제 심심했겠다며 저녁 때 다 같이 샤먼 바위에 노을을 보러 가자고 했다.            


다음 도착지는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 노래가 떠오르는 곳이었다. 드넓은 언덕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들로 가득했다. 횡단열차에서 만났던 Purbo가 귀띔해준 대로 나무에는 천 조각들이 잔뜩 흩날리고 있었다.



형형색색 다양한 천 조각만큼이나 저마다 다른 소원들이 함께 걸려있겠지.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며 이곳에 천을 묶어두었을까 궁금했다. 무엇을 빌었을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가장 간절한 것을 한 번쯤 떠올렸겠지 싶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나무를 하나 골라 Purbo가 선물해준 파란 천을 묶고 소원을 빌었다.



라미스와 나는 다시 긴 이동을 하기 전에 화장실을 들렀는데 그곳 화장실은 선샤인 호스텔 화장실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듬성듬성한 천으로 어설프게 둘러진 곳 바닥에는 구멍조차 없었다.



라미스에게 "우리 호스텔 화장실이 여기보단 나은 것 같아" 하며 웃었다. 라미스는 "아무것도 없는 초원보단 낫지" 하고 웃었다. 라미스의 낮고 깊은 목소리 때문인지 그녀의 한 마디는 내 맘 깊숙한 곳에 오래 맴돌곤 했다.



투어를 마치고 다 같이 샤먼 바위에 노을을 보러 갔을 때다. 라미스는 손에 쥐고 있던 내 가방을 보더니 바위에 내려놓고 오라고 했다. 바위를 건너가려면 두 손이 자유로운 게 나을 것 같아서 가방을 놓으려고 하는데 거기에는 날개 달린 수개미 처럼 생긴 벌레들이 우글우글했다.



"여기 벌레가 엄청 많다" 하면서 가방 놓길 잠시 주저했다. 그러자 라미스는 "They don't do anything" 하고 말했다. 그녀의 문장이 또 한번 맘 속에 맴돌았다. 라미스의 한마디는 집에 벌레가 들어오면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쟤들은 네가 더 무서워"라고 말하던 아부지와 닮아있었다.



해가 지는 풍경을 감상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빗방울이 쏟아졌다. 이게 올혼 섬에서 보는 마지막 노을일 텐데 아쉬웠다. 루도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루도는 나에게 "이르쿠츠크에 돌아가면 얼마나 더 있을 거야?" 하고 물었다. "글쎄, 이르쿠츠크는 내가 좋아하는 동네라서 있고 싶은 만큼?" 그는 내 이르쿠츠크 억양에 웃음을 터트리더니 발음이 맘에 든다며 자꾸 다시 말해달라고 했다.



이르쿠츠크, 참 좋아하는 동네인데 발음하기는 참 어려운 동네다. 러시아 사람들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이르쿠츠크를 그냥 발음하면 종종 되묻곤 했다. 막상 나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던 터라 루도에게 물어봤다.



루도는 '쿠'에서 심장 통증을 호소하듯 강세를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알려준 대로 '쿠'에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심장을 부여잡고 발음했더니 그럴듯하게 들렸다. 오 핵꿀팁.



석양을 보고 돌아온 방 안에는 잠자리만 한 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가 들어와 있었다. 라미스의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잘 준비를 했다. "They don't do anything.. They don't do anything.."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이 단번에 바뀔 리가 없었다. 나에게 돌진하는 잠자리 벌레한테 결국 "아무것도 안 해도 난 네가 싫어!"라고 외쳤다. 혼자 있으면서 자꾸 느는 건 다이나믹한 혼잣말뿐이다.



예정대로 올혼 섬에서의 두 밤이 지나고 다시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처음엔 막막했던 구멍뿐인 화장실도 시스루 샤워실도 너무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떠날 때가 되자 앞으로 '선샤인 호스텔은 호텔이었구나'를 깨닫는 곳도 있겠지 싶었다. 그때도 시간이 약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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