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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쭈그러든 마음은 펴질 틈이 없고

내 소셜 스킬의 행방은 어디에

영과 욘이 아껴줬던 바이칼 호수 풍경을 보러 올혼(Olkhon)섬으로 떠나는 날. 호스텔 라운지에 앉아 미니버스를 기다렸다. 미니버스는 도심 곳곳에 있는 호스텔을 서너 군데 돌고 나서야 올혼 섬으로 출발했다. 차 안은 남는 자리 하나 없이 여행자들로 빼곡했다.   

나는 같은 호스텔에서 탑승한 사람들과 앉게 되었는데 낯선 무리들 틈에 끼어있는 게 영 어색했다. 그 무렵 혼자 다니면서 인사 몇 마디 빼고는 입에 거미줄을 쳤던 시간들의 부작용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미 친분 있어 보이는 외국인들의 급물살처럼 빠르게 흐르는 영어 대화 속을 비집고 들어갈 자신도 없었다. 어디로 증발했는지 모르겠는 내 소셜 스킬의 행방을 찾으며 괜히 창밖을 쳐다봤다.



창밖에는 Window XP 버전 바탕화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초록색 들판과 파란색 하늘의 뚜렷한 경계 사이로 풀을 뜯는 소와 말이 팝업 카드처럼 등장했다. 올혼 섬에 2박 3일 머물 예정이었는데 도착도 하기 전에 벌써 아쉬운 기분.



드넓은 풍경이 주는 신선함과는 별개로 5시간 동안 오도카니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고역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도 날 소외시키지 않았다. 낀 적이 없기 때문에 뺀 적도 없었다.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도 될 것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친분 있는 그룹+관심 없어 보임+언어장벽의 삼위일체 앞에 나는 주저했고 스스로 벽을 세워 고립시켰다. 대화에 끼는데 언제 용기까지 필요해진 걸까 의문이 들었다.



한껏 쭈그러든 맘은 당최 펴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니라던 토영이의 당부가 떠올라 움츠러들었던 날개 죽지라도 쭉 폈다.



올혼 섬에 도착하자 기사님은 호스텔에 차를 세울 때마다 힘찬 손가락질로 내릴 사람을 지목했다. 더 게임 오브 데스 같은 기사님의 삿대질을 설레는 맘으로 기다렸다. "you, you, you!" 기사님이 나 포함 세 명의 여행자를 콕콕콕 짚었다. 이렇게 반가운 삿대질이 또 있을까.



버스 창밖 너머로 보이는 호스텔 풍경은 알록달록한 이불이 빨랫줄에 얹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호스텔의 산뜻한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기사님은 갑자기 "Sorry, Sorry"하며 날 막아세웠다. 쩝 여기가 아닌갑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아 다시 지목되길 기다렸지만 사람들이 모두 내릴 때까지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살짝 불길한 기분이 들 때쯤 기사님은 "Here!" 하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셨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후지르(Khuzhir) 마을의 선샤인 호스텔로 욘의 추천을 받아 알게 된 곳이다. 일주일 전에 이곳을 다녀간 욘은 가격 대비 시설도 괜찮고 주인 분이 친절하다며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다만 당부했던 한 가지는 예약을 선샤인 호스텔로 하되 운영은 미니 바이칼 호스텔에서 하니 주소를 미니 바이칼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선샤인 호스텔을 찾아갔다가 문이 닫혀 있는 바람에 다소 애를 먹었던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아예 버스 도착지를 미니 바이칼 호스텔 주소로 예약해 두었다.



호스텔에 도착하면 새로운 기분으로 올혼 섬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 떠날 때처럼 들뜬 마음으로 트렁크에 잠자고 있던 배낭을 들쳐 업는데 뚝 하고 엄지손톱이 부러졌다. 아 불길하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미니 바이칼 호스텔의 호스트는 몇 가지를 확인해 보시더니 여기가 아니라 선샤인 호스텔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로 오게 된 경로를 설명했지만 호스트는 그때랑 운영이 달라졌다며 선샤인 호스텔 관계자를 불러주셨다.


추측해보면 욘이 방문했을 때는 선샤인 호스텔이 문을 닫아 욘이 예약 없이도 미니 바이칼 호스텔에 묵을 수 있도록 호스트가 도와주셨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선샤인 호스텔이 운영을 하는 중이라 예약대로 선샤인에 머물러야 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떠나기 전에 버스 예약과 더불어 미니 바이칼에 묵는 게 맞는지 문의했지만 메일 답장에 별다른 언급이 없길래 그러려니 넘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버스에서부터 지금까지 올혼 섬 여행의 시작이 영 좋지 않았다.                     



선샤인 호스텔의 관리자 Liara가 찾아와 15분 정도 떨어진 언덕으로 날 데리고 갔다. 선샤인 호스텔은 버스에서 보았던 다른 여행자들의 숙소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크기는 아마도 이 동네 호스텔 중에 가장 클 것 같았다. 광활한 언덕 위에 침실, 화장실, 식당이 제각각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길치는 자칫하면 밥 먹으러 갔다가 방을 다시 못 찾아갈 판이었다.



리아라는 맨 처음 침실을 보여줬다. 독채로 된 침실에는 두 명이 써도 넉넉할 만큼 커다란 침대가 한가운데 떡 하니 놓여있었다. 리아라는 나에게 열쇠와 자물쇠를 하나씩 건넸다. 무엇인고 하니 방문 잠금장치였다.



다음은 화장실이다. 리아라 뒤를 쫄레쫄레 따라간 그곳에는 있어야 할 변기는 없고 나무판자 아래로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다. 내 머리 속도 구멍이 뻥 뚫린 듯 할말을 잃었다. 할머니 댁에서도 써본 적 없는 온전한 푸세식 그 자체였다. 마음속으로 욘의 이름을 외쳤다. 욘ㅠㅠㅠ                


다음은 샤워실이다. 화장실에서 맞은 예방주사 덕분에 샤워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 이번엔 뻥 뚫린 창문에 나풀거리는 시스루 커튼이 날 맞이했다. 여긴 아래든 옆이든 죄다 뻥뻥 뚫려있구나 하하하. 다시 한번 욘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욘ㅠㅠㅠㅠㅠ

      


 탓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호스텔 사이에 운영 방침이 바뀐 것을 그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멘붕이 오자 욘에게 연락해 미주알 고주알 우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샤인 호스텔에 와이파이가 있을 리 없었다. 데이터도 잘 안 터지는 마당에 하소연은 사치였다. 그래, 혼자 견디라는 운명이겠거니.                 



버스에서 쭈굴해졌던 마음을 펴기는커녕 잔뜩 구겨졌다. 낮에 느낀 소외감과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움이 세탁기 속 빨랫감처럼 잔뜩 엉켜졌다. 나를 더 슬프게 한 것은 이 호스텔에 묵는 여행자가 나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황당한 상황을 나누며 웃어넘길 사람이 없었다.



먹을 것으로 마음을 달래볼까 싶어 챙겨온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 이르쿠츠크 근처 마트에서 파는 음식 중에 가장 좋아하는 닭고기 요리였다. 하지만 차게 식은 음식은 마음을 더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르쿠츠크가 그립고 그곳에 롤링스톤즈 호스텔이 그리웠다. 2박 3일이 짧다고 느껴졌던 마음은 구멍 뚫린 화장실을 들어왔다 나갈 때처럼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이곳에서의 3일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챙겨온 음식으로는 마음의 허전함이 영 채워지지 않았던 나는 식사 시간표를 발견하고 부엌에 저녁을 주문했다. 저녁 값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시켰다.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이라도 먹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다행히 음식은 따뜻하고 맛있었다. 하지만 기분을 풀려고 먹는 음식은 언제나 그랬듯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혀끝을 지나 목구멍을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만 위안이 될 뿐이지 그 후에는 기분 나쁜 배부름이 묵직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동네 한 바퀴를 한참 돌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혼자 지내기 커다란 방에는 냉기가 돌았다. 루싸가 챙겨준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따뜻했다. 그녀가 나중에 내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와 있었다. 문을 코앞에 두고도 출구를 찾지 못한 파리는 창문에 바짝 붙어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었다.



손부채질로 쫓아내 보았지만 영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녀석을 두고 "아휴 그래, 너라도 있어라."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적막하던 방 안이 위잉 파리 소리로 채워졌다. 올혼 섬의 첫날밤이 룸메이트 파리와 함께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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