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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언어의 장벽이 아닌 마음의 장벽

잘 안 들리면 천천히 말해달라고 하면 되지

올혼 섬 투어를 마치고 이르쿠츠크에 있는 롤링스톤즈 호스텔로 돌아왔다. 집에 온 기분.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풍경에 마음이 놓였다. 호스텔 스태프인 Alexandr는 날 보더니 "Hey" 하고 장난스럽게 가방을 툭 쳤다. 다시 만난 그가 무지 반가웠다.

떠날 때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호스텔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새로운 방을 안내받기 위해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 너 맞아?" 고개를 돌려보니 애니와 발리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10킬로가 넘는 가방을 멘 채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애니! 발리! 우아! 어떻게 여기 있어??"


올혼 섬으로 자전거를 타고 떠났던 애니와 발리는 예정에 없던 이르쿠츠크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애니가 자전거 핸들에 배를 부딪히면서 올홈 섬까지 가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윽, 애니 진짜 아팠겠다. 지금은 좀 어때?" 걱정되는 마음에 애니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애니는 여기 와서 푹 쉰 덕분에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내일 몽골로 다시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는 애니와 발리에게서 담담한 여유가 느껴졌다.


"너는 이제 어디로 가?" 애니는 나의 다음 여행지를 물었다. "예카테린부르크랑 페름에 들렸다가 카잔으로 가려고! 거기서 한국과 독일 월드컵 경기가 있거든." 애니는 마침 예카테린부르크와 페름에서 카우치서핑으로 만난 호스트들을 안다며 그들의 프로필을 알려주었다.


카우치서핑, 이름부터 흥미로운 이 플랫폼을 알게 된 것은 카우칭서핑만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던 토영이 덕분이다. 왠지 모르게 싸이월드 파도타기가 떠오르는 카우치서핑은 그 대상이 가상의 방이 아니라 진짜 카우치라는 것을 빼면 싸이월드 파도타기와 은근 닮아있다.


카우치서핑을 통해 호스트는 공간을 무료로 공유하고 게스트는 호스트와 시간을 보내며 문화를 교류한다. 자신의 공간을 낯선 사람과 나눈다는 것, 처음 만난 사람의 공간에 머문다는 것.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기도 전에 이미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이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쫄보는 낯선 곳×낯선 사람 콜라보로 뭉친 미지의 세계가 겁나기도 했지만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깔려있는 카우치서핑에 점점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만하던 카우치서핑의 물꼬를 애니 덕분에 수월하게 틀 수 있을 것 같았다.


애니와 라운지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다.

"올혼 섬은 어땠어?" 애니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었다.

"올혼 섬에서 본 바이칼은 정말 멋졌어."

나도 모르게 바이칼을 본 사람들이 내게 지었던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순간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섬까지 가는 차 안에서는 좀 외로웠어. 애니 네 말은 신기하게 잘 들리는데 그 차 안에서는 사람들 말이 잘 들리지도 않고 끼기가 어렵더라. 내가 영어를 잘 못하거든."


애니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무 문제 없어. 잘 안 들리면 천천히 말해달라고 하면 되지."

"그러게, 왜 그 말을 못 했을까."


애니의 말처럼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천천히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된다.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그 말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알아들은 척 혹은 내가 알아들은 줄 착각할 때 의사소통은 꼬이고 대화는 덜 익은 국수 가락처럼 툭 끊긴 채 긴장이 이어진다.


애니와 이야기하면 그런 조바심이 들지 않았다. 못 알아들을까 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지도, 잘못 전달될까 봐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지도 않았다. 가끔은 내가 쓰는 언어가 외국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애니와의 대화에서 언어는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느낀 어려움은 언어의 장벽이 아니라 마음의 장벽 아니었을까.


"너는 왜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어?" 애니가 꽤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내가 가진 두려움을 깨고 싶어서 여기 왔어, 지금 피했다간 살면서 또 마주칠 것 같았거든."

애니에게 처음 꺼내는 나의 이야기였다.


"너 정말 용감하다."

애니는 특유의 깊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들을 만날 거야."


애니의 말에 눈물 샘 끈이 톡 끊어진 듯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애니는 내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그날 밤 그녀와의 대화는 체한 속을 달래주는 죽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다음날 아침, 애니와 발리는 처음 안녕을 했던 날처럼 100미터 밖에서도 눈에 띌 형광 주황색 티를 입고 있었다. 부부를 다시 만난 것처럼 형광 주황색 티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그들은 떠나기 전 나에게 또 한 번 일용할 양식을 전해주었다. 메밀밥 반 통. 조금 짤 수도 있다고 했던 애니의 걱정과는 달리 내 입맛에 딱이었다.


애니와 발리를 배웅하러 밖으로 나왔다. 지난번보다 자전거에 짐이 많이 줄어있었다. 애니는 짐의 반을 집으로 보냈다며 이제 더 우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코끝을 다부지게 든 애니는 "Elegance~" 하면서 자전거 타는 시늉을 냈다.


"애니, 너는 표정이 진짜 다양하고 흉내를 잘 내는 것 같아, 마치 배우처럼." 전부터 느꼈던 점을 애니에게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그녀의 꿈은 배우였다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해 아쉬워 보였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삶의 무대에서 충분히 많은 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배우 같았다.


발리는 사이클링에 관심 있는 독일인 부부에게 자전거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있었다. 애니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리는 나에게 수다스럽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발리가 더 수다스러워" 하고 그의 등 뒤에서 나에게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애정이 담긴 험담에 그들 사이가 또 한 번 부러웠다. 둘이 하는 여행은 어떤 기분일까 잠시 생각했다.


애니와 발리가 허리 춤에 나란히 메고 있는 가방을 보고 전부터 궁금했던 그들의 로고에 대해 물어봤다. 부부의 친구가 직접 디자인해주었다는 로고는 자전거 바퀴 모양에 해 뜨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그림에는 'Magunk útján'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헝가리 말로 자신의 길을 가라는 뜻, 그리고 자신의 길을 벗어나라는 뜻. 그들에게 참 어울리는 문장이다.


헤어지기 전에 그들과 아쉬운 포옹을 나눴다. 발리는 처음 안녕을 했던 날보다 나를 더 꼭 안아주었다. "다음에 또 만나" 다음을 기약하는 그의 말에는 가벼운 인사치레가 아닌 묵직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처음 안녕을 했던 날처럼 형광 주황색 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언젠가 어디선가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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