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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마음 안 주고 살긴 글렀어

또 다른 집, 롤링스톤즈 호스텔

"여기에 3주나 있었다고? 하하하"

내가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머문 기간을 답하면 항상 돌아오는 반응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르쿠츠크는 여행자들에게 보통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 바이칼에 가기 위해 머무는 경유지에 가깝다. 하지만 나에게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보다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남아있다.

아기자기한 건물들, 먹거리 가득한 로컬 시장, 취향저격 엽서를 파는 소품샵, 케이크가 맛있는 카페 등등.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곳이 그리운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또 다른 집, 롤링스톤즈 호스텔이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이 영국 유명 록 밴드의 팬인가 싶었던 롤링 스톤즈의 뜻은 말 그대로 정말 '구르는 돌'이라고. 그렇게 이름 뜻부터 내 맘 속에 굴러 들어온 롤링스톤즈를 어느샌가 호스텔이 아닌 집이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를테면 피곤한 발걸음을 돌리며 '아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다.' 하고 혼잣말을 할 때라던가,

'응 엄마, 나 지금 집에 가고 있어.' 하고 엄마가 없는 집을 집이라 부르며 행선지를 이야기할 때.


아늑한 시설, 편리한 위치, 공짜로 제공되는 쌀 등등, 롤링스톤즈 호스텔에 오래 머문 이유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곳이 또 다른 집처럼 편하게 느껴진 이유는 친절한 스태프들 덕분이었다.


특히 곰돌이 푸를 닮은 스탭, 알렉산드르는 푸근한 느낌에 재밌는 사람이다. 그는 첫 만남에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혀의 진동이 필요한 '르으으' 발음을 강조하며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애석하게도 아직도 마스터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나를 손님이 아니라 친구처럼 대하는 그가 편했다. 위챗 계정이 해킹을 당해 곤란했을 때도 내가 부탁한 도움보다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하룻밤씩 숙박을 연장하던 내가 내일은 이르쿠츠크를 떠나 예카테린부르크로 갈 거라고 했더니 알렉산드르는 오늘이 정말 마지막 날냐며  물었다. 사실 이르쿠츠크에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낯선 곳이 두려워서 떠나지 못하겠는 마음이 이르쿠츠쿠가 좋아서 떠나지 못하겠는 마음을 어느 순간 앞질렀기 때문이다. 틀 깨러 여기까지 왔는데 이르쿠츠쿠에 이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간 나 자신을 속일 것 같았다.


떠나는 날 아침, 롤링스톤즈 식구들에게 엽서를 썼다. 엽서는 동해 여행 때 머물렀던 호스텔을 찍은 사진으로 만들었는데 롤링스톤즈의 따뜻한 분위기와 비슷해서 골랐다.


어떻게 엽서를 줘야 할까 쭈뼛거리다가 창문에 모기장을 달고 있는 알렉산드르에게 가서 괜히 말을 걸었다. 알렉산드르와 모기장에 대해 예쁘다 값이 싸다 어쩌고저쩌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알렉산드르가 이제 가냐고 물었다.


나는 엽서를 건네며 "디스 이즈 포 롤링스톤즈 패밀리" 하고 말했다. 사진 설명을 듣더니 알렉산드르가 좋아했다. 카운터 앞에서 알렉산드르가 가방 메는 걸 도와주었다. 그는 인사를 하며 나를 안아줬다. 울컥, 눈가가 시큰했다. 옆에 있던 스탭, 다샤도 안아줬다. 눈물이 차올랐다. 키가 가장 큰 스탭도 안아줬다. 눈물이 쏟아졌다.


아 울고 싶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허그 쓰리 콤보에 눈물샘이 지고 말았다. 왠지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에 "암쏘 새드. 아윌 미슈 가이즈."라는 말을 남기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중간에 서서 얼굴을 제대로 못 든 채 "바이 바이" 인사를 한 뒤 문밖을 나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내내 펑펑 아니 철철 울었다. 우는데 왜 우는지 모르겠다. 한국 집 떠날 때도 이렇게 안 울었는데.


뭐라도 잃어버린 애처럼 길거리 사람들 속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계속 계속 눈물이 났다. 21일 동안 매일 아침 굿모닝 인사를 하고 매일 저녁 굿나잇 인사를 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건 생각보다 더 아팠다.


울면서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쓸데없이 정은 많아가지고"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오빠가 했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음 주지 마


오빠는 동생이 행여 낯선 곳에서 사람들을 쉽게 믿었다가 마음 다칠까 봐 아예 주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하지만 동생은 낯선 곳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마음들로 헤어짐이 힘들었다. 오빠의 염려 포인트와 조금 다르게.


이르쿠츠크 거리를 걸으며 떠오른 오빠의 당부에 "오빠, 나는 마음 안 주고 살긴 글렀어. 다시 태어나야 해." 하고 혼잣말로 답했다.


롤링스톤즈 호스텔 인스타 계정에는 나와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가 올라와 있었다.

"That feeling when you became a part of the big 'RS hostel' Family and it's too sad to say goodbye and l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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