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하기 딱 1시간 전. 달리는 횡단 열차 안에서 나는 내릴 준비를 거의 마쳤다.
이제 2층 침대에 올려 둔 휴대폰과 공용공간에 꽂아둔 삼구 멀티탭만 가지고 오면 딱이다.
맞은편 1층 침대를 쓰던 러시아 친구 아르센에게 예카테린부르크까지 남은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손목시계를 가리킨 후 아르센에게 "예카테린부르크, 아진?"하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아진."하고 답해주었다. (*러시아어로 숫자 1)
'좋았어! 시간 넉넉하고 내릴 준비도 완벽해!'라고 생각하며 2층 침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 '덜컹-' 기차가 흔들렸다.
쿵-
사고는 한순간이었다. 사다리를 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면서 온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떨어지면서 침대 앞에 있던 탁자에 등을 부딪쳤는지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아팠다.
1초 만에 벌어진 이 상황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짐도 꾸려두었고 내릴 시간도 확인했고 새로운 동네를 여행할 준비가 완벽했는데. 2층 침대에서 떨어진 순간 내 몸은 준비가 안 되고 말았다. 열차에서 내릴 생각에 두근대던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1초만, 딱 1초만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머리가 멍한 상태로 바닥에서 실눈을 뜨자 아르센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가 새어 나왔다.
내리기 딱 1시간 전에 떨어지다니. 생각보다 아찔한 높이의 2층 침대를 48시간 동안 조심스럽게 오르고 내렸던 시간이 무색해졌다.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나는 아르센에게 말했다.
아..아진....
아르센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2층에서 떨어지고도 웃고 있는 나를 보고 머리가 다친 건 아닐까 싶었을 거다.
미처 못 챙긴 3구 멀티탭. 069 열차에서 요긴하게 쓰이고 있기를.
믿고 싶지 않았던 그 상황은 현실이었다. 바닥에서 꼼짝 못 한 채 누워있던 나를 아르센이 부축해서 1층 침대 칸에 뉘어주었다. 기차 스태프 분들이 병원에 연락해 준 덕분에 예카테린부르크 역에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퀴 달린 환자 이송 침대에 실려 구급차로 가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기차 타러 오는 길에 봤던 비둘기 시체가 예카테린부르크에 오지 말라는 불길한 신호였을까.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세 달 동안 고민하다 떠난 여행인데 한 달만에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구급차까지 왔으니 병원비 장난 아니겠지?
순간, 환자 이송 침대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돈 굴러가는 소리로 들렸다. 불량 신자는 갑자기 신을 찾으며 기도했다. 제발 보험 처리되게 해 주세요.
병원에 도착해서 엑스레이 검사를 한 후 진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는 대신 바디랭귀지로 내 상태를 설명했다. 의사는 등 뒤쪽 갈비뼈를 가리키며 손가락 두 개를 편 다음, 나뭇가지 부러뜨리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뽀각!
나는 벙찐 얼굴에 놀란 토끼 눈을 뜨며 되물었다. "뽀각?!"
의사의 바디랭귀지에 따르면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단다. 믿을 수가 없었다. 살면서 골절상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무리 심해도 금 정도 나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엔 숨 못 쉬게 아팠지만 진통제 덕분에 고통이 가셔서 인지 설마 부러졌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은 했지만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결과는 내 마음속에 의심의 싹을 틔웠다.
'혹시 내가 외국인이라고 사기 치는 거 아냐?'
'왜 엑스레이 사진도 안 보여주고 뽀각이라는 말만 하는 거지?'
의심이 가득해진 나는 의사에게 엑스레이 사진을 요구했다.
러시아에서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드문 경우인지 의사는 나의 요구가 이상하다는 듯 웃으며 사진을 가져다 보여주었다.
아... 뽀각 맞구나. 갈비뼈 두대가 아주 예쁘고 깔끔하게 부러졌구나. 내 멘탈도 뽀각하고 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