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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You're not alone

우리 모두가 너의 가족이야

아침에 눈을 떴다. 병실 전등에 눈이 부셨다. 어제의 사고는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카우치 서핑으로 알게 된 호스트 Olga네 집에 있어야 하는데, 러시아 병실 침대에서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진 채 누워있었다.


병실에는 나보다 먼저 입원해 있던 베로니카와 레나가 있었다. 베로니카는 러시아어를 못해 곤란한 내 사정을 생각해 옆 옆방 환자인 빠샤를 소개해주었다. 빠샤는 이름처럼 쾌활한 기운을 가진 러시아 친구였다.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반갑기는 생전 처음. 빠샤는 내가 의사와 소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입원 초기 나의 감정 기복은 마치 변덕스러운 예카테린부르크의 날씨 같았다. 해가 쨍쨍하다가 먹구름이 끼더니 우박이 한바탕 쏟아지고 다시 날이 개는 것처럼.


예를 들면 레지던트 안톤이 입원서류 작성을 위해 병실에 왔을 때, 아무렇지 않게 서류에 사인을 하다가도 앞으로 내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거지 싶어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난다든지.


병원에서 나온 밥을 잘만 먹다가도 병문안을 오신 레나 어머니를 보자 "나도 엄마 보고 싶어.." 하며 애처럼 울음이 터져 나온다든지.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다가도 이상할 정도로 터지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런데 변덕스러운 날씨 같은 기분에 결국 태풍이 휘몰아치고 말았다.   


그날은 진통제 주사를 두 대나 맞은 부작용으로 속이 무척 울렁였다. 병원에서 나온 밥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음식 특유의 달달한 맛이 속을 더 메스껍게 했기 때문이다.


속을 가라앉히기 위한 한국음식이 절실했다. 마침 배낭에 있던 인스턴트 미역국과 맛다시가 생각났다. 문득 떠오른 한국 음식의 존재에 잠시 활기가 돌았다. 그 당시 한국 음식은 나에게 그냥 음식이 아닌 영혼의 진통제와도 같았다.


하지만 미역국과 맛다시가 들어있는 배낭은 짐 보관소에 따로 있었다. 규정상 병실에 들어올 때 최소한의 짐만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담당 간호사 나타샤에게 구글 번역기로 짐 보관소에 있는 배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타샤는 기다리라는 제스처만 한 뒤 한나절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결국 복도에 나와 다른 간호사에게 짐 보관소의 물건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간호사도 방법을 몰랐는지 다른 간호사에게 물어보았고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어느새 간호사, 환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모였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괜찮다고 하고 병실에 들어가려는데 나타샤가 나타났다. 러시아어 대화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다른 간호사가 나타샤에게 짐 보관소에 대해 물어본 것 같았다.


나타샤는 갑자기 짜증을 확 내더니 화난 말투로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면서 휙 하고 가버렸다. 나는 황당한 나머지 옆에 있던 다른 간호사에게 "나타샤가 나 때문에 화가 난 건가요?" 하고 물었다. 그 간호사는 "네, 그런 것 같아요." 하고 말했다.  


서럽고 억울한 마음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나는 그저 한국음식이 너무 필요했을 뿐인데. 바쁜데 방해될까 봐 한참을 기다리다 물어본 건데. 다짜고짜 화를 내는 나타샤가 야속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상황에 그 사단이 나니 마치 내가 이 병원의 진상 환자, 트러블 메이커가 된 기분이었다.


먹구름처럼 변해가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복도 끝으로 가서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훔쳤다. 빠샤의 병실 메이트인 데이비드가 오더니 내가 갈비뼈 때문에 우는 건 줄 알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왜 울어, 갈비뼈가 걱정돼서 그래? 너 병실에 같이 있는 베로니카랑 레나 알지? 베로니카는 갈비뼈가 네 대 부러졌고, 레나는 열 대가 부러져서 입원했대. 그러니까 두 대 부러진 건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 마, 금방 나을 거야."


데이비드가 나를 다독여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미 삐뚤어진 마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아, 그들이 다친 거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거. 그런데 한 대가 부러지든 두 대가 부러지든 아픈 건 아픈 거야. 너무 힘들어. 그들은 가족들이 매일 병문안을 오지만 난 여기 혼자잖아. I'm alone!"


그렇게 울면서 뒤를 돌아봤는데 통역을 도와줬던 빠샤가 나를 보더니 쓸쓸한 얼굴을 하고선 뒤돌아 갔다. 순간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데이비드가 말했다.

"You're not alone. 넌 혼자가 아니야. 여기 있는 동안 베로니카도 레나도 빠샤도 안톤도 다 네 가족이야. 그리고 나도. 그러니까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데이비드의 말에 머리를 댕-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곳에 혼자 왔지만 이미 혼자가 아니었다.

여기서 받은 따뜻한 마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톤은 바쁜 스케줄에도 꼭 병실에 들러 "How are you?" 하고 내 안부를 물었다.

레나는 어머니가 가져오신 간식을 나에게도 꼭 나누어 주었다.

베로니카는 자기 전에 이불을 꼭 덮어주었고 본인 몸이 아픈데도 내가 씻는 것을 도와주었다.

빠샤는 어깨 수술을 받은 날에도 아픈 팔을 붙들고 러시아산 체리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뺘샤 방에 갔을 때 인사만 나눴던 데이비드도 지금 이렇게 내 걱정을 하며 옆에 있어주었다.  


그 고마운 마음들을 서러움 한 번에 모두 놓아버릴 뻔했다. 혼자가 아님을 다시 깨닫게 해 준 데이비드에게 무척 고마웠다.

쓸쓸하던 빠샤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찾아가 사과를 했다.

"빠샤, 미안해. 아까 나는 여기 혼자라고 한 거 말이야. 순간 속상해서 한 말이었지 네가 나에게 써준 마음들을 잊은 건 아니었어. 이젠 정말 내가 여기서 혼자가 아닌 거 알아. 고마워, 빠샤."


빠샤는 웃음 띤 얼굴로 괜찮다며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따뜻한 손길에 소용돌이치던 태풍이 서서히 멈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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