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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001열차 17칸 27번

나의 상상 속 횡단열차는 그들에게 일상이라는 것

러시아 횡단열차, 세상에 그런 열차가 존재한다는 걸 언제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듣자마자 '멋지다' 하고 마음속에 쟁여 두었던 기억은 얼핏 떠오른다. 너무 넓어서 감이 안 오는 러시아 땅을 무려 '횡단'할 수 있다는 열차는 여행에 별 관심이 없던 내게도 흥미로웠다.           

러시아를 가로지를 수 있다는 사실 말고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부분은 열차가 주는 불편함이다. 청량리에서 정동진까지 5시간 걸리는 거리에도 몸을 배배 꼬았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70시간을 달리는 기차 속에 있으면 어떨까 싶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70시간 동안 함께 하게 될 사람들이 궁금했다.                    



그렇게 상상 속에 환상이 약간 더해진 횡단 열차를 타는 때가 2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기차역 플랫폼에 도착하자 모스크바 시간으로 맞춰둔 시계가 눈에 띄었다. 내 손목시계는 블라디보스토크 시간으로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기차역의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역 안과 밖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만 같아 느낌이 묘했다.  



열차 시간은 모두 모스크바 시간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해당 역과 모스크바와의 시차를 잘 계산해야 했다. 내가 예매한 열차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2시 10분에 떠나지만 +7시간 시차를 고려해 블라디보스토크 시간으로 저녁 7시 10분에 타야 했다.



당분간 내 자리가 될 곳은 001열차 17칸 27번이다. 27번 자리는 3등석으로 오픈형 침대인데 보통 한 식탁을 두고 아랫자리 두 명, 윗자리 두 명, 혹은 맞은편 자리 두 명도 같이 공유하는 형태다. 그렇다 보니 내 옆자리에 누가 타게 될지가 가장 궁금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열차가 도착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27번 자리에 앉자마자 28번 자리를 돌아봤는데, 동양인 여자분이 앉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하이!" 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내게 "하이~"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웨어아유프롬의 ㅇ자를 떼기 전, 그녀가 메고 있는 가방이 한국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킬리인 것을 보고 확신했다.                  



"혹시 한국 사람이세요?!"

방언 터지듯 나온 한국어에 서로 손을 뻗어 3초 전보다 더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각자 우연히 잡은 자리가 서로의 옆자리라니,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 장면은 횡단열차 밖 풍경보다 놀라웠다.                     



열차 메이트가 된 한국 친구의 이름은 영이다. 영은 호스텔에서 알게 된 또 다른 한국 친구가 16칸에 타고 있다고 했다. 영은 그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미리 해주었는데 그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내가 사는 동네와 비슷한 곳에 사는 것 같다고 했다.


횡단열차 바로 옆자리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것도 모자라 옆 칸에 이웃 주민이 타고 있다니. 이거 꿈인가? 볼이라도 꼬집어 봐야 할 지경이었다.                     



곧 우리 칸에 놀러 온 그와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중학교 동창생 훈이와 닮았다? 그가 우리 동네에산다던 정보가 겹쳐지면서 횡단열차에서 10년 만에 동창생과 재회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훈이의 분위기와 너무 달라서 선뜻 확신을 못하고 긴가민가했다. 게다가 그가 정말 훈이라면 아는 척을 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훈이와 별 친분이 없었을뿐더러 훈이의 일진 시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훈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잘 안됐다.       


그렇게 혼자 고민을 하다가 알게 된 그의 이름은 훈이 아니라 욘이었다. 횡단열차에서 동창생을 만나는 스토리가 열 배는 더 놀라웠겠지만 나는 처음 만난 동네 사람이 더 반가웠다.                   



우연이 가져다준 반가움과 상상 속 열차에 탑승했단 사실에 바람이 가득 찬 풍선 마냥 들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용기마저 생긴 것일까. 27번 자리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외국인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헬로, 웨어알유프롬?" 하이톤이 약간 섞인 나의 물음에 그녀는 짧게  "하이" 하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마구 부풀어 있던 풍선 바람이 스르르 빠지는 것 같았다.                          



나의 경우 국가를 정해놓은 질문을 받는 것이 별로라 그녀에게 굳이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러시아인인 그녀에게 나의 물음은 마치 무궁화호에 탄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어디 나라 사람이냐고 질문하는 격이었다.



열차 탑승 후기마다 외국인 친구와의 교류가 빠지지 않는 것을 봐서 그런지 횡단열차가 지구촌 친구, 위아더월드의 장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의 짧은 인사로 아차 싶었던 것은 나의 상상 속 열차는 그들에게 일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 들뜬 여행자가 낀 것이 괜히 부끄러워 혹시 몰라 챙겨 왔던 화투를 꽁꽁 숨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횡단열차의 밤은 고요했다. 밖이 어두워지면 열차는 불을 끄는데 어둠이 주는 고요함이 꽤나 평화로웠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어둠이 주는 안정감과 반대로 열차는 무척 흔들렸다. 문득 휴가 때 열차를 타고 싶다고 했던 솜방 생각이 났다. 솜방 멀미 괜찮으려나.



흔들림에 익숙해지자 요람에 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요람 하니 뜬금없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본래 개념과 전혀 상관없이 예전부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묘하게 무서웠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한 끗 차이인 느낌이 왠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는 열차에서 요람과 무덤을 번갈아 떠올리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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