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행의 첫 숙소는 아르바트 거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Neptunea(넵튜니아)라는 게스트하우스다. 길을 따라 올라갔는데 지도상으로 숙소가 있을 법한 곳에 건물을 부수는 공사를 하고 있어서 순간 식겁했다.
첫 숙소부터 망조인가 ! 싶었는데 다행히도 넵튜니아는 골목 안쪽을 따라 언덕진 길을 좀 더 올라가야 있었다. 이 앞에서 헤매는 여행자가 많은지 어떤 러시아 아주머니가 호스텔? 하면서 방향을 알려주셨다. 고맙습니다, *스바시바! (욕 아님 주의, *러시아어로 고맙습니다.)
넵튜니아의 첫인상은 시골집 같은 편안함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호스트 Reinis가 반겨주었다. 레이니스의 첫인상은 장난스러운 느낌이 친근한 사람이었는데 내 배낭을 보더니 한국어로 "힘두뤄" 하고선 그에 맞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선 종이를 하나 건넸는데 어색한 한국어로 쓰인 맥주 쿠폰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말을 아는 러시아 호스트와 한글로 쓰인 쿠폰이라니. 숙소 분위기가 러시아 시골집 같아서 그런지 뜻밖에 만난 한국과의 연결고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소개를 따라 하루 묵을 방으로 들어갔다. 2층 침대 3개가 들어선 6인실 방은 배낭이 들어가니 통로가 꽉 찰 정도로 빽빽했다. 침대에 털썩 앉았는데 몸에 꼭 맞는 침대가 오히려 안락하게 느껴졌다.
시간도 늦었고 따로 장 본 것이 없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첫 끼는 한국에서 가져온 누룽지를 먹었다. 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붓고 누룽지를 휘휘 풀어 한 숟가락 입에 탁 넣었는데, 하 너무 맛있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룽지는 세계 여행 선배인 당무 언니의 추천으로 챙겨 왔는데 아주 꿀템이다. 독일에 있는 한국 청년이 누룽지는 '잘 말린 한국'이라 했는데 200프로 동감한다.
러시아로 떠나기 직전에 저지른 바보짓을 해결하기 위해 공용 식탁 겸 라운지에 앉아 철도청에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박을 하고 바로 횡단 열차를 타려 했는데 일정을 바꿀까 싶어 표를 알아보던 중, 실수로 기존 표를 먼저 취소해 버린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블라디에 좀 더 머물러야지 싶어 새로운 표를 알아보았으나 가격이나 시간대가 영 적당한 게 없어서 결국 내가 취소했던 자리를 다시 잡았다.
러시아 횡단 열차는 언제 취소하든 반드시 수수료를 물게 되어있는데 같은 자리를 다시 구매한 거라 수수료가 너무 아까웠다.
한 푼이 아쉬운 여행자는 철도청에 구구절절 메일을 쓰다가 문장이 안 풀리자 습관적으로 손가락 뚜둑 소리를 냈다.
그랬더니 식탁 끝 쪽에 앉아있던 러시아 청년이 놀라며 말을 걸었는데 잘생긴 얼굴에 내가 더 놀랐다.
러시아 청년 : "그거 몸에 안 좋아! 나도 그 습관 있었는데 몸에 안 좋대서 이제 안 해."
나 : "아 그래? 좋겠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고치는 게 어렵네."
습관 고치는 게 영어로 뭔지 몰라서 그냥 I can't fix it 하고 말했더니 표현이 웃겼는지 그는 활짝 웃었다.
우스갯소리로 외국 남자랑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했던 지혜언니의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러시아 꽃미남과의 추억이 여기까지면 참 좋았을 텐데.....
시간이 꽤 흘렀을 무렵, 노트북으로 해야 할 일을 한참 하고 있었는데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헤이!" 하고 나를 불렀다.
돌아봤더니 그는 말없이 입술을 두드리는 흉내를 냈다. 건조해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몇 번 두드렸던 것 같은데 그걸 흉내 내는 듯했다. 시끄러웠나 싶어서 "방해됐어? 미안해!" 하고 말했는데 그는 고개를 가로로 젓더니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술 두드리는 흉내를 냈다.
뭐 어쩌라는 거지? 싶어서 "무슨 말이야?" 하고 물었더니 말은 안 하고 이번엔 볼에 바람을 넣는 시늉을 하더니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무리 바디랭귀지는 만국 공통 언어라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아돈 언더스탠" 하고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엔 그와 나를 번갈아 가리키더니 볼에 바람을 움파파 넣고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아!! 알았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춘 듯 무릎을 탁 쳤다.
"양치하자는 말이지? 근데 왜?"
뜬금없이 이를 닦자는 게 의아해서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다시 입술을 두드리더니 자신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 ㅆ.....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니? ㅆ.....
제발 내게 음란 마귀가 씌어 착각한 것이길 바라며 마침 식탁에 있던 칫솔세트를 들고 "이거?" 하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잘못 걸렸다.......
나는 더 이상 모르겠다는 듯 "아돈 언더스탠" 하며 등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랬더니 그는 나에게 "두유 원트 언더스탠?" 하고 물었다.
와.... 나 세상에 이해하고 싶냐는 말이 이렇게 무서운 적은 처음이다. 나는 태연한 척 "노 땡스!" 하고 노트북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렸다.
휴, 그때는 너무 무서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지나고 보니 생각할수록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러시아에 온 첫날부터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는 것도 그렇고 양치로 알아들은 것도 그렇고. 다행이다, 별일 없이 해프닝으로 끝난 기억이라. 러시아 꽃미남, 너와의 추억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쓰바씨바 (욕 맞음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