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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 Nov 17. 2019

낯선 곳이 주는 신선한 충격

중앙선을 넘나드는 택시보다 강렬하고 짜릿한 출발

때는 태양이 내리쬐는 5월의 끝자락이었다.

20년 넘게 산 동네를 떠나 옆 동네로 여행을 시작했다.



첫 여행지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다. 돌아올 날짜는 아직 미정이다. 몰랐는데 티켓을 편도로 끊었다면 해당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교통수단의 티켓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횡단 열차 미리 안 끊어뒀으면 큰일 날 뻔. 여행 초짜 티가 팍팍났다.                



여행 내내 나와 함께 할 배낭의 무게는 15.9kg. 체감 무게는 20kg이 넘는데 생각보다 가벼운 녀석이었다. 매순간 함께 할 배낭에 이름을 붙여줬다.



이렇게 큰 배낭을 가지고 떠나는 것도 처음이고 위탁 수하물 맡기는 것도 처음이라 모든 게 어리둥절했다. 호신용 스프레이와 맥가이버 칼이 진짜 통과가 될까 궁금했는데 호신용 스프레이는 용량이 작은 것이라 괜찮고 맥가이버 칼도 통과 가능하다고! 예쓰!



가는 날이 오긴 하는구나. 떠나기 전에 부모님과 함께 가장 그리울 것 같은 음식을 먹었다. 잘 다녀오겠다는 딸내미의 인사에 어무이는 '딸래미 보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잘 지내고 재밌는 일 많이 있길 바라' 하며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 어무이에게 아부지는 이 시간 이후로 딸래미는 잊어버리라며 영상통화하겠다는 딸래미에게도 '하면 뭐 해, 짜증만 나니까 하지 마' 라고 투박하게 말씀하셨다.


예전 같았으면 아부지의 투박함에 너무 서운해서 파르르 거리며 싸웠을 텐데 이제는 아부지의 투박함에 가려진 마음을 조금은 안다. 그때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는데 러시아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 저 장면을 떠올리면 많이 슬프다. 공항에서 인사하면서 당연히 울 줄 알았는데 거기서는 안 울고 횡단 열차에서 울 줄이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떠나기 전날, 아부지는 기능성 등산 바지가 꼭 필요하다며 괜찮다는 나를 데려가 통풍이 잘 되고 젖어도 잘 마르는 바지를 사주셨다. 바지를 사주시더니 윗도리도 똑같은 게 필요하다며 윗도리도 사주셨다. 그러다 내가 신고 있던 신발을 보시더니 그런 신발로는 절대 안 된다며 기어코 신발까지 덜컥 사주셨다. 그렇게 미리 당겨 받은 생일 선물 3종 세트를 여행 내내 장착 중이다. 아빠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며 웃던 아부지 얼굴이 떠오른다. 아부지, 떡 나오더라 최고.



비행기를 타는데 무척 떨렸다. 설렘보단 두려움에 좀 더 가까웠다. 살아돌아올 수 있겠지?



간다 간다 진짜 간다!



비행기는 금방 높이 올라 내가 나고 자란 땅을 보여줬다.


이 땅에 있을 아끼는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약 없이 떠나는 여정이다 보니 나도 그들도 이게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끝이 주는 묘한 용기 덕분에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거나 혹은 전하지 못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살면서 몰랐으면 어쩔뻔했나 싶게 아찔하도록 진한 마음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마음을 들을 수 있어 떠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내게 건네준 걱정과 응원들이 생각나 울컥했다.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2시간 30분을 날아 도착한 블라디보스톡의 첫 풍경은 의외로 논밭이었다. 처음 와본 동네인데 왜 이리 친근하지?



제주 항공을 타고 한국 사람들과 우르르 내렸더니 흡사 제주도에 온 기분. 불과 2시간 전에 긴장했던 게 조금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익숙함도 잠시 입국심사, 배낭 찾기, 현금 인출 등등 처음 해보는 여러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심사는 제주항공 타고 왔냐는 질문에 예쓰라고 대답만 하면 돼서 생각보다 쉬웠고, 배낭 찾기는 애먹을 뻔했는데 한국 분들이 알려주신 덕분에 덜 헤매고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은 ATM기에서 러시아 루블을 인출하는 것이었다. 인출 옵션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이리저리 해매는 와중에 내 뒤에 바짝 붙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러시아 아재까지 등장.

주륵,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어휴 돈 벌기도 힘들지만 돈 뽑기도 힘드네.


         

유심은 러시아의 통신업체 중 하나인 MTC에서 구매했다. MTC 직원은 업무가 지겨운지 카운터 앞에 턱을 괴고 굉장히 무기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심을 구매하고 그에게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기차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는데 심드렁해 보이는 그에게 업무와 상관없는 질문을 하기가 조금 조심스러웠다. 내 질문에 그냥 귀찮은 듯이 "아돈노" 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무기력한 표정이지만 생각보다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 해서 쫌 놀람. 이 때는 몰랐다. 러시아 사람들이 츤데레라는 걸.



기차는 운영시간이 끝나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야 했다. 그가 알려준 방향대로 가보니 버스는 배차시간이 많이 남아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 공항에서 도와주셨던 한국 분들을 우연히 다시 만나 같이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여자 세 분이서 우정 여행차 놀러 오셨다고 했는데 나이도 동갑이라 엄청 신기했다.



택시를 잡던 중 호객을 하던 택시 기사님의 흥정 가격이 꽤 괜찮아서 타기로 했다. 기사님의 첫인상은 뭐랄까 쿨내가 진동하는 타입이었는데 첫인상처럼 운전도 엄청 후리 했다.



한국어로 '주소! 주소!' 하시더니 우리가 건넨 종이 지도를 탁 가져가서는 앞을 보지 않고 지도를 내려다보며 운전하는 클라스^^  물론 기사님은 중앙선을 넘나드는 것도 개의치 않아하셨다.



전면 유리는 왜 금이 가 있을까 하하. 버스 탈걸 그랬나 하하. 슥 하고 안전벨트 맸더니 기사님은 자기 못 믿냐는 듯 손을 절레절레 흔드셨다. 아 그게 한국에서 안전벨트는 생명줄이라 배웠습니다만^^;


러시아 운전 문화가 원래 이런 건지 기사님의 운전 타입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러시아 첫 택시는 아주 짜릿했다.



택시로도 꽤나 달려서 블라디보스톡의 시내인 아르바트 거리에 도착했다. 택시에 내려서 고마웠던 한국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후 거리로 눈을 돌렸다.



아르바트 거리를 보자 공항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전혀 딴 세상에 온 기분이 확 느껴졌다. 이제서야 한국을 떠나 낯선 곳에 발을 딛고 있구나 싶었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3시간도 채 안되는 거리를 날아왔는데 이렇게나 다른 풍경이 펼쳐지다니! 마치 가상현실 체험을 하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했다.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할 풍경들이 내게는 모두 낯설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건물에 붙어 있는 창문 하나하나, 러시아어로 가득한 햄버거 광고판, 심지어 횡단보도 신호등까지. 그 와중에 지나가는 비둘기는 똑같아서 빵 터짐. 타지에서 보니까 반갑다 너.



배낭을 메고 20분 남짓 걸리는 숙소를 찾아가는 동안 '미쳤다, 미쳤어! 러시아에 와 있다니, 내가 진짜 미쳤다!' 하면서 미쳤다는 말을 미치도록 혼자 중얼거리고 다녔다.


나에게 여행은 막상 가면 좋지만 안 가도 그만인 것이라 사실 여행 맛을 잘 몰랐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 확실히 알 것 같다. 낯선 풍경이 주는 충격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훨씬 신선하고 즐거웠다.


비행기를 탈 때는 두려워서 두근거리던 마음이 어느새 설렘이 되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때의 두근거림은 중앙선을 넘나드는 택시 보다 강렬하고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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