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긴 순간

소중한 경험을 한 순간은 더욱 값진 시간으로 느껴져

by 정이안

짧고 긴 순간



흥정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 했던가. 소중한 경험을 한 순간은 더욱 값진 시간으로 느껴진다. 짧은 시간에 치른 값진 단막극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은 실제 상황입니다. 국민 여러분 경계경보가 발령 중입니다”


적기가 서울 상공에 출몰하여 우리 군도 대응하고 있다는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공습경보가 발령 중입니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방송국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적기가 서울 상공을 향하고 있어 순식간에 머리 위로 날아올 것 같았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1983년 여름 포항 월포리 해수욕장에서 겪은 지울 수 없는 이야기이다.


지점에 부임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이다. 경영평가에서 하위에 머물던 점포가 최우수지점 표창을 받았다. 은행 예금고는 지점경영평가의 척도였다. 창구에서 친절하게 고객을 응대하면 예금이 쑥쑥 늘어나는 시절이었다. 객장 분위기는 여직원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지점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은 창구직원의 노고에 칭찬은 물론 격려금까지 듬뿍 챙겨주었다. 잔치에 축하객이 많아 부조금이 수북이 쌓여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우리의 마음은 한껏 들떴고, 오는 일요일 월포리 해수욕장으로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여행 준비를 할 때는 물론 버스 안에서도 기분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뿌듯한 마음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일행은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바닷물과 한 몸이 되어 물 위에서 뒹굴며 신이 났다. 물놀이 후,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었다. 나는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가방 지킴이로 남았고, 일행은 백사장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일행이 파도타기에 넋이 빠져있을 즈음, 혼자서 비치파라솔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울려 퍼지는 사이렌에 귀가 번쩍 뛰었다. 뒤이어 나오는 아나운서의 숨 가쁜 목소리에 놀라 혼비백산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다급한 마음에 양팔을 휘저으며 일행들의 이름을 목청껏 외쳤다. 절규에 가까운 울부짖음은 바닷물에 묻혀 버리고 전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빨리 물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눈물 섞인 절규는 메아리도 없었다.


모래밭에 얼어붙은 발은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었다. 순간 ‘지점으로 혼자 돌아가면 어떻게 하지. 지점장실에 꿇어앉아서 감당할 수 없는 질문에는 어떡하면 될까. 겁 많은 내가 출근할 수 없을 테니 사표를 내야 하는데 어쩌지’ 빛의 속도로 스치는 생각에 울음조차 목에 걸려 컥컥거리며 토해내지 못했다. 최악의 상황까지 악몽을 꾸듯 혼자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백사장을 엉금엉금 기면서 물가로 향했다. 얼굴이 눈물과 모래로 범벅이 되어서야 일행들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때마침 스피커를 통해 아나운서의 말이 흘러나왔다. 북한군이 러시아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것이라는 짧은 맨트와 “국민 여러분께서는 일상생활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확성기는 잠잠해졌다. 월포리 상공에서 전투기가 포탄을 퍼붓는 아찔한 상상화를 그리던 붓이 아니던가. 나는 모래밭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허탈함으로 기진맥진한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떠날 때와는 달리 우리 일행은 맥이 빠진 채 이른 귀갓길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사과와 위로에 대꾸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일행들에게 미안하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침착하지 못한 처신이 부끄러웠다. 불과 몇 분 동안이지만 당황한 마음에 울고불고 나무라며 난리를 쳤으니 동료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회한의 눈물이 대구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중공기가 한국 영해를 침범해서 휴전 이후 30년 만에 최초로 공습경보가 내려졌으며, 중공군 파일럿 쑨첸렌이 MIG-21 기를 몰고 한국 공군기지에 비상착륙 후 귀순했다는 국방부 공식발표였다. 아울러 귀순 조종사는 대만으로 망명 요청이 있어 우리 정부는 허용했다고 덧붙였다. 1983년 8월 7일 일요일 정오부터 시작된 나의 일기에 담긴 진한 그림이다.


나의 역사책에 쓰인 글씨 중에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자서전에 옮길 수 있기에 다행이지, 국사에 남겨질 일이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전율이 느껴진다. 그날의 에피소드는 다시 만들 수도 있을 수도 없는 혼자 치렀던 전쟁이 아닌가.


매 순간 침착하게 대처하자고 다짐을 한다. 20분간 겪은 짧은 경험이었지만, 농부가 오래도록 땀 흘려 지은 곡식처럼 마음의 양식이 되어 곡간을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