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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May 02. 2022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2%

<민주주의 공부: Democracy Rules>를 읽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들 한다. 보수정당이건 진보정당이건 구분할 것 없이 이구동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음에 부닥친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긴 한건가? 그렇다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위기 요인은 무엇인가?”


얀-베르너 뮐러의 저작 <Democracy Rules: 민주주의 공부>는 그 해답을 얻는 데 필요한 실마리다.



우선, 저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얀-베르너 뮐러는 독일인으로 현재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정치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저작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에서는 현대 극우 포퓰리즘의 발흥과 그들의 수사를 명료하게 파헤친 걸로 유명하다.


이 책의 플로우가 마음에 들었다.

‘가짜 민주주의’ - ‘진짜 민주주의’ - ‘(민주주의 유지에 필요한) 매개 기구’ - ‘민주주의 재건’.

일련의 정반합 구조를 취함으로써 무엇이 문제이고 해법은 무엇일지 일목요연하게 추적한다. 이 책이 훌륭한 이유는 현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의 집단사고groupthink적 폐단을 간단명료하면서도 시원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뮐러는 현대 포퓰리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포퓰리스트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진짜 국민’ 또는 ‘침묵하는 다수’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P.23)


즉, 본인과 소속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국민이자 애국자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뜻이다. 벌써부터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시는가?


“일부만이 진짜 국민에 속한다는 메시지는 특정 시민의 입지를 구조적으로 약화한다. 이미 여러 가지 이유로 정치체제 내에서 입지가 취약한 소수자, 이민자,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의심받는 이들이 여기 해당된다.” (P.24)


지난 5년간 양대 정당의 팬덤이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단어는 ‘깨어있는 시민: 깨시민’과 ‘애국시민’ 따위의 것들이다. 그리고 정치제도권 내의 엘리트들은 이 흐름에 편승하여 ‘민주적 통제’, ‘선출된 권력의 기득권 통제’ 등 그럴싸한 수사들을 동원했다. 이러한 명분으로 선출직 정치인들은 검찰과 경찰, 법원, 언론 등을 싸잡아 ‘기득권’이라 부르며 위협했다.

(서로가 서로를 기득권이라 인정해주는, 아주 보기드물게 겸손하고 훈훈한 장면들이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마치 나폴레옹 3세처럼, 이들도 법관과 언론인에게서 받는 모든 비판를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게 누구더라?’라는 질문으로 받아쳤다. 인도의 재무장관은 ‘민주주의가 비선출직의 독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고, 폴란드의 법무장관 역시 독립된 사법부를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폴란드는 민주주의 국가지 ‘법관지배’ 국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

이 대목을 읽는데 주어만 바꾸면 우리네 정치인들의 발언들이라 해도 감쪽같이 속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 대선 전국 방방곳곳에서 이재명, 윤석열 두 후보가 서로에게 쏟아부은 말과 너무 닮아있다.


그렇다. 이렇듯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배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무너져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적법하게 단계별로 착착 맞아 떨어지는, 점증법의 모습을 보여 시민들을 눈속임하기에도 쉽다. 즉,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달 동안 신문의 정치 면을 물들인 소식들은 모두 ‘국회’의 ‘적법한 회의절차’에 따른 것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걸까?

물론 있다. 바로 민주주의 ‘제 1의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에 뮐러는 자유 / 평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있다. 바로 ‘불확실성’이다. 가뜩이나 시끄럽고 정돈 안 된 이 현실에서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정치학자 애덤 쉐보르스키가 탁월하게 짚었듯이, 민주주의는 ‘불확실성을 제도화’하는 정치체제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예측하지 못한 사건사고, 갈등을 항상 겪게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이를 제도적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게끔 고안된 총체적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정당, 언론, 법원, 시민사회 등등 다원적 정치 행위주체들이 있기에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욕구와 이해관계들이 조정될 수 있다.


생각해보자. 불확실성이 없고 모든 결말이 정해져있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일당 독재사회다. 그러니 함부로 “민주주의는 시끄럽다”느니 비하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언젠간 그런 시끄러운 소란이 나와 내 가족의 권리를 위해 싸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뮐러는 단언한다. 트럼프를 뽑았다고, 브렉시트에 찬성했다고, 극단적 포퓰리즘을 내세운 정당을 뽑았다고 해서 그 유권자들을 비하하고 시민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이들로 무시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그들 역시 본인이 투표한 정치세력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언행을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이재명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윤석열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 거칠다는 것’ 정도는 투표자들 모두 알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 세력에게 기회를 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극심한 양극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삶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자 반엘리트, 반기득권 담론을 앞세운 포퓰리즘 세력에게 그나마 기회를 한번 줘보는 것이다. 유권자들을 서로 ‘개돼지’라고 욕할 게 아니라 상황을 그 지경까지 몰고간 정치사회 엘리트들의 무능과 담합을 냉정히 비판하자는 뜻이다.


결국, 얀 베르너-뮐러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친 비관도 낙관도 경계하자고 말한다. 그 대신에 자유와 평등, 그리고 불확실성의 제도화에 충실하자고 제안한다. ‘제 1원칙’으로의 회귀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가르침처럼, 낙관주의는 희망과 다르다. 전자가 확률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누군가가 그 길을 택할 가능성과 관계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다.” (P.221)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규범들이 낙관이라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희망의 영역이라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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