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학원 시절...
서른 중반에 시작한
일본 지방 국립대 대학원 석사과정은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수업은 많지 않았지만 전공을 살짝 바꾸었더니
수업의 내용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고
내가 준비해야 할 발표내용과 리포트의 포인트조차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연구생까지 했는데도
전공책을 한 장 읽고 페이지를 넘기면
앞 페이지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학회에 참석해서 집중해서 들어봐도
그들이 정말 일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게 맞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외계어로 들렸다.
석사 과정을 잘 해내야 박사 과정 진학에 할 수 있고
그래야 일본에서 체제 할 수 있는 자격(비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대학원을 직장이라 여기며 평일에는
무조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 갔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전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준비해 아이들과 먹고
아이들의 학교와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도왔다.
둘째를 자전거에 태우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다음 바로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
낮 시간 동안 수업하고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있다가
오후 다섯 시쯤 아이들을 데리러 방과 후 교실과 어린이집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해서 함께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씻기고 놀아주고 숙제 봐주고 한국어 가르치고 열 시쯤 재운다.
아이들이 잠들면 학교 리포트와 연구 계획서, 조사보고서 등을 쓴다...
평일은 계속 이런 루틴으로 지냈다. 그래도 공부할 시간이 모자랐다.
토요일은 아이들과 근처 공원을 가거나
한국어교실에 데리고 가거나 한국 교민 가족들과 어울렸다.
나는 혼자서 밀린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어려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고
평일에는 늘 바빴기에 주말이라도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일요일은 매주 아이들과 교회를 갔다.
친인척이 없는 낯선 외국에 사는 내게 한인교회는 오아시스와 같았다.
나는 예배를 통해 힘을 얻고 교회분들과 한국어로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아이들은 교회분들에게 이쁨과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취직하기 전까지 6년을 보냈다.
아이들 방학 때는 더 힘들었다.
물론 대학원생인 나도 방학이라 직장인보다는 낫겠지만
아이들만 놔두고 공부하러 학교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방학 때가 가장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것 같다.
또 방학이 되면 아이들과 한국에 이주 정도 귀국해야 했는데
조사와 논문에 쫓기는 내게 2주 동안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큰 타격이라 귀국할 때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시댁에서도 남편에게도
나의 대학원 생활... 수업과 리포트와... 조사와 논문이...
얼마나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작업인지 털어놓을 수가 없어서
나는 늘 친정에 가면 몇 시간이고 하소연하곤 했다.
대학원 생활 모든 과정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계속하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재미도 있었고 생각도 변해갔다.
연구실에 소속되고 보니 학과 행사를 준비하거나
학부 후배들을 지도하는 등
나에게도 대학원생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 선배, 후배, 동기, 교수님들 등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남편에게는 적만 두고 안 다녀도 되고 졸업하지 않아도 되는
일본체류를 위한 도구로서의 대학원이었지만
내게 있어서는 중요한 사회생활이 되었고...
특히 수업에서 배운 내용들은 내 인생의 가치관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회 속에서 실망시키지 않고 인정받고 싶어졌다.
대학원을 다니며 나는 서서히 남편과 다른 방향을 쳐다보게 되고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