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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Aug 19. 2024

별거 10년째(3)

정신 나간 여자

어머, 애들이 아니라 엄마가 유학하러 오셨다고요?
남편이 보내주셨나요? 우와, 부러워요. 남편이 정말 부인을 사랑하시나 봐요.


14년 전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 둘을 데리고

석사과정을 밟으러 일본으로 왔을 때 사람들이 내게 한 말들이다.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쭈빗쭈빗 망설이다

아, 네 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라며 얼버무리곤 했다.


기러기 아빠들의 우울증이나 자살 소식,

기러기 가정의 이혼 소식이 뉴스에서 자주 들려오는 가운데...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삼십 대 엄마가 박사과정도 아닌 석사과정을 시작하러 기러기 가족이 된다니...


시간이 좀 지나 친하게 된 한국 언니에게서 내가 한국 교민들 사이에 남편 고생시키는 정신 나간 여자

안줏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음…

우리가 기러기 가족이 된 사연은 이렇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일본으로 1년간 언어연수를 왔다가

일본에 있는 대학에 다시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생각했었지만

한국에 있던 남편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지냈다.

나는 일본 유학생활이 너무 힘들었었기 때문에

다시 일본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를 낳으며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어졌고...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대학원 진학에 대한 갈망도 커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가운데

남편이 먼저 함께 일본에 가서 사는 것은 어떤지 물어왔다.

(남편도 당시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기체류를 하기 위해서는 유학이나 취업 등 목적에 맞게 체류자격과 체류기간을 부여받아야 한다.

또한 일본은 미성년의 아이들만 유학하는 것은

전국 몇 개의 학교에 한정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부모가 유학이나 취업을 하여 체류자격을 얻으면

그 자녀들은 가족 체제 비자로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장 쉬운 방법이

일본어에 능통한 내가 대학원을 진학하던지 취업을 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남편도 당시에 붐이었던 IT 연수생으로 갈 수 있을까 알아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를 따라 일본에 간 후 일본어학교를 다니고 일본어가 능숙해지면 

일본에서 취업하거나 일본어학교와 전문학교, 대학원 등에 진학할 수 있을까 살펴보기도 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으로의 이주를 준비했다.

한국에 다니기도 편하고 아이들 키우며 생활하기에도 좋을 것 같은 도시를 찾아보았다.

나를 지도해 주실 수 있는 대학과 교수님도 알아보았다.

남편과 여러 군데를 살펴보고 한 도시를 정한 후, 

 도시의 좋은 국립대학의, 나를 지도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 교수님께 이력서를 보냈다.

운 좋게 그 교수님은 나를 지도해 주시겠다고 연락이 왔고 

대학원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살 도시와 동네, 내가 다닐 학교와 교수님이 모두 결정된 가운데 

갑자기 남편이 본인은 일본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음.....???

음.....???

우리만 가라고???


남편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이들이 일본에서 지내면

한국처럼 학원을 많이 다니면서 공부 공부하며 경쟁 속에서 지내지 않을 테니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편하고 일본어도 덤으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물론 나도 그런 생각에는 충분히 동의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일본에서 생활하고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닌

내가 석사와 박사과정 하는 5년 정도 일본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는 동안...

본인은 전세금을 빼서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일본 가서 대학원에 적만 걸어놓고(?)

대학원은 다니지 않아도 되고 졸업하지 않아도 되니까(?)

체류자격이 있는 동안 본인이 보내주는 돈 받으며 좀 편하게(?) 아이들과 지내라는 것이었다.

(석사 때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수료할 수가 없고 수료하지 못하면 박사과정 진학 자체가 안되고

체류 자격도 받을 수 없는데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한국 교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남편 고생시키는 정신 나간 여자>란 말은 억울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신 나간 여자>는 상당히 맞는 말이었다.


첫째,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 둘을

친인척, 친구도 없는 외국에서 나 혼자 잘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둘째, 일본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경험한 적도 없으면서

막연히 애 키우면서도 박사과정까지 진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셋째, 일본에서 애들을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한국보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편하게 성장할 거라고 생각한 것,


넷째, 남편의 사업이 잘 되어 우리가 다시 같이 살게 되는 5년 후엔

투자한 전세금의 몇 배는 더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다섯째, 남편의 들뜨고 즐거워하며 확신에 찬 모습을 보며

차마 나의 불안과 어이없음, 불만을 말하지 못한 것...

친구가 만든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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