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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j Feb 18. 2021

8,965km 떨어진 곳에서 설을 쇠다

5개국 다섯 명의 룸메이트들의 한국식 설 보내기

'뭐! 내가 한국에서는 서른 살이라고!' (스물여덟 살 내 친구 마리)


한국사람들은 왜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보통 한두 살씩 나이를 더 많게 세는지, 

그렇다면 그 나이는 도대체 왜 태어난 날에 더해지지 않고 1월 1일에 사이좋게 한 번에 더해지는지...

외국 생활을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설명했을, 한국인인 나도 궁금한 우리의 문화다. 

'왜 그렇게 하는 거야?'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히고 '그래, 왜 그렇게 되는 거지?'라고 스스로 반문하다가도 '글쎄, 뱃속에 있는 아기의 아홉 달도 존중해주는 거 아닐까?'라는 그럴싸한 대답을 찾곤 한다. (1월 1일에 함께 나이를 먹는 건 아직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나의 삶 자체가 되어서 당연시 여겼던 우리 문화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질문을 듣다 보면 동시에 나의 관점도 넓고 깊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게, 왜 우리는 시간은 하나, 둘, 셋으로 세면서 분은 일, 이, 삼으로 세는 걸까? 왜 이렇게 된 거지?'라는 식의 한국에 있었으면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들을 깊이 생각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함께 사는 친구들에게 설날에 대해서 설명했다. 왜 음력 달력이 존재하는지부터 매년 캘린더를 사면 엄마, 아빠, 할머니, 이모의 음력 생일부터 검색해서 적어야 하는 기분 좋은 수고로움까지 설명하고 나면 내가 정말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더 확실해진다. 설명은 길고 그동안 친구들이 집중을 잃지 않을까 재미를 더해서 말해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왜 설날이 중요한지 알고 보내면 더 좋지 않은가!


좀 더 쉬운 예시를 찾다가 설날이 유럽의 크리스마스와 비슷하다는 점을 찾았다. 며칠간 일을 하러 가지 않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날이라는 점에서 크리스마스는 꽤나 쉽고 영리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때로 내가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한다는 것에 굉장히 안타까워하며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설날 같은 날이니까 나를 안쓰럽게 보는 거겠지만 사실 나는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 서운하지 않다(물론 혼자서 보낸다면 그건 좀 슬프겠지만). 하지만 설날은 조금 다르다. 작년이나 재작년 설은 학교를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채로 지나쳤지만, 올해 설은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며 도란도란 떠들거나 티비를 보다가 배가 꺼질 틈도 없이 할머니가 해주시는 또 다른 음식을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밀어 넣는 그런 시간들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갈 수 없기에 그리움은 더 커진다. 아쉬운 마음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마찬가지 같아 보였다. 올해는 진짜 내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으니,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새로운 '식구'들과 설날을 함께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이 친구들에게는 처음 보내는 설인데 뭔가 맛있고 한국적인 음식을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떡국을 끓여 먹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 추위에 편도 40분간 자전거를 타고 오페라 근처에 있는 한인마트까지 갈 힘이 없었기에 보다 가까운 중국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메뉴를 구성하기로 했다. 함께 둘러앉아 만들 수 있고, 입만 즐거운 게 아니라 직접 빚는 경험까지 할 수 있는 만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거기에 곁들일 메뉴로 김밥과 유부초밥을 떠올렸다. 

실패확률 거의 없이 만족감 높은 메뉴 중 하나인 유부초밥과 김밥

김밥이 우리에게는 김밥천국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끼니를 간단하게 때우는 메뉴이지만, 여기서는 꽤나 고급 음식에 속한다. 이런 점도 우리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면중 하나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고 쉽게 생각했던 음식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 눈에는 정성과 시간을 들인 고급 음식인 것이다.(김밥은 물론 준비하기 번거로운 음식이긴 하지만 우리네 어머니들은 너무나도 뚝딱뚝딱해내시지 않은가.) 나 스스로도 김밥의 가치를 더 높게 여기게 되었다. 또 김밥을 대접하는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이제는 사람들이 '와, 스시를 만들었네!'라고 하는 말에 '스시 아니거든!!!'이라고 욱하기보다 차분히 그 차이점을 설명해주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음식을 나눈다는 건 생각보다 더 아름다운 행위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내적으로 더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방법이 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나누어 먹으면서 친밀감을 쌓아가는 것에 익숙하다. 사탕 한 봉지를 나눠서 먹거나, 학교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제안들,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게임을 하면서 라면을 나눠 끓여먹는 일들로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친구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채식을 하는 친구, 특정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는 친구, 편식을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져서 그들을 생각하면서 메뉴를 구성하는 것에도 은근히 재미가 들렸다. 그 친구가 못 먹는 것을 떠올리며 과연 어떤 걸로 대체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또 자연스럽게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 우리는 더 가까워져 있는 것이다. 


만두를 생각한 건 참 잘한 일 같다.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 준비를 다 같이 한다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인가! 준비한 만두피가 너무 적어서 많은 양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만두가 다 쪄졌을 때 자기가 만든 만두가 무엇이었는지 맞추는 재미까지 있다

떡국도 없는 설날의 상차림이지만 모두가 모여 앉은 식탁에서의 그 분위기만큼은 설날에 비할만했다. 부족할 줄 알았던 젓가락도 기적처럼 딱 맞게 찾았으니 모두가 행복하고 완전한 식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 술은 없지만 우리 집에는 모히또 장인이 산다. 칠레에서 온 따또가 만들어준 모히또에 김밥과 만두를 입 한 가득 씹으니 오전에 가족들과 통화했을 때의 서운함과 그리움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이래서 '식구'라는 말이 생긴 거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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