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한 명쯤은 존재하는 꼰대 부장의 시조새
작은 중소기업을 다녔기에 내가 경리팀에 있어도 경리직원은 단 한 명, 나뿐이었다.
팀이라고 해봤자 팀원 구성원이 없다.
그래서 내 밑으로는 직원이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고
대신 내 위에 상사들은 주기적으로 교체가 되었다.
잡채 과장이 나간 뒤로 새로 입사한 K부장.
그는 우리의 갑인 대기업에 오랫동안 일하면서 우리를 뒷구녕으로 도와준 숨은 공신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매달 고문료가 지급되었었다.(다른 회사들도 이런 스파이는 한 명쯤 있는 건지 진심 궁금하다)
그는 대기업을 퇴사하고 사장의 제안으로 우리 회사에 입사했다.
오, 굉장한 능력자신가?
그래도 대기업 18년 버티기 쉽지 않지.
그만의 필살기가 있나 보다!
내심 기대감이 컸었다.
고문료를 받을 때 가끔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와 그와 통화를 할 때면 왠지 모를 아우라가 전화를 통해 느껴졌다.
하지만 같이 일해본 그에 대한 기대감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말로 꼰대의 원조격.
우리 아빠보다 더 아빠 같은 그의(당시 50대 초반) 사상들을 접할 때면 나는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아, 진정 이것이 꼰대다를 보여준 그의 언행은 마음의 빗장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들을 그는 찐으로 사랑했다.
여기서 대기업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회사 자체가 워낙 남자비율이 높았기에 그 옛날 사무실에서 담배 피우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아했다.
그리고 그는 회장님에 이어 방귀대장 뿡뿡이였다.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지만 나중에는 그의 방귀에 익숙해져 갔다.
그래 속이 많이 불편하신가 보다 정도로 합의를 보고 내 귀에도 양해를 구했다.
어느 날인가 점심을 먹고 2차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옆테이블에 있는 아줌마들을 보며 그는 말했다.
남편이 밖에서 벌어다 준 돈으로 저렇게 커피숍 와서 수다나 떤다고.
저 아줌마들 팔자가 편하다며 일면식도 없는 그녀들을 오징어처럼 씹어댔다.
저런 마인드를 가지고 사는 남자랑 사는 여자는 더 힘들겠지.
나도 모르게 그와 말을 섞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잡채 과장처럼 나에게 막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적인 이야기 말고는 사생활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남자직원들도 그를 꽤나 불편해했다.
여자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고지식한 꼴통 같은 그의 업무 스타일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실제로 그 밑으로 들어온 남자 직원도 1년 반 만에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경리는 4대 보험 관리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사무직은 2년에 한 번 국가에서 나오는 건강검진을 당해 말까지 해야 하는데 이를 어길 시에는 과태료가 부과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실행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직원들이 기한을 넘기지 않고 건강검진을 해야 하는 의무감이 나한테는 있었다.
근데 유독 K부장은 남들이 다 하고도 끝까지 귀찮아서 미루고 미뤄 연말까지 내 애간장을 녹였다.
“부장님, 건강검진 하셔야 하는데요, 이거 안 하면 우리 회사로 과태료 나올지도 몰라요.
제발 꼭 하세요!”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이런 핑퐁대화는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얼굴 안색이 맨날 탄 고기 같았는데 담배 피워서 그런 게 아니었나...
아무리 불편하고 나랑 결이 안 맞는 부장이었어도 아프단 소식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을 하고 심지어 회사까지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돌아와서 나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응?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내 덕분에 건강검진 하다가 용종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 내 업무 중에 하나였을 뿐 그의 건강이 걱정돼서 하라고 한건 아닌데
어쨌든 나의 재촉으로 그는 암을 발견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내가 구세주가 된 격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가끔 잊을만하면 건강검진 이야기로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나와는 다른 결이라 맞지 않는 사람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9시간을 버텨내는 ‘동료’였다.
회사라는 공간은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져 있다.
우리는 어찌 보면 회사를 움직이게 만드는 작은 부속품일 뿐이다.
내가 다닌 중소소소소기업에도 여러 인간 군상들이 다 모여있기에
더욱이 이 밀집된 공간에서 불편한 인간관계가 생긴다면 이보다 쌩지옥도 없다.
하지만 웃프게도 그 안에 인간애를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짜증 나고 나를 미치게 하는 사람이어도
예상치 못한 일로 내가 어려워할 때 손을 내밀어 줄 때도 있다.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이 딱인 공간이다.
부장님, 지금은 건강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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