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회로 유명한 사천에서 점심을 들고 경포로 돌아오는 길. 경포에서 사천으로 갈 때는 멋진 바다 풍경을 보며 걸었지만 돌아오는 길엔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테라로사 커피숍이 보였다. “어, 여기에도 테라로사 커피숍이 있네?”하며 놀란 기색을 보이자 나이가 제법 든 기사가 “보헤미안 커피숍도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라며 룸미러를 통해 대답했다. “보헤미안이요?”라고 반문하자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강릉에는 테라로사 말고도 보헤미안 커피와 커퍼 커피가 각기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아마도 옛 선인들의 풍류가 커피로 고스란히 옮겨온 모양이다. 택시가 테라로사 경포대점에 도착했다.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부리나케 입구로 다가갔더니 나를 반긴 것은 ‘정기휴일입니다’라는 팻말이었다.
다음날. 경포호를 걸었다. 호숫가에 있는 방해정, 경호정 그리고 금란정을 지나며 경포호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에 살포시 집을 앉힌 옛사람들의 풍류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집들은 하나같이 ‘어서 와!’ 하며 나를 향해 손짓을 하는 듯했다. ‘아예 강릉으로 이사할까?’ 하며 커피 한 잔을 사들고 경포대에 올랐다. 정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배를 깔거나 등을 대고 편하게 누워있었다. 그 틈에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슬그머니 끼어 망연히 경포호를 바라보았다. 하루 온종일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풍경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니 정자 뒤쪽으로 야트막한 산을 휘감아 도는 길이 보였다. 강원도 곳곳에 조성해 놓은 바우길 가운데 11구간이었다. 끌리듯 길에 올랐다.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신사임당의 대표작인 사친(思親)을 써 놓은 것도 있었다.
천리 먼 고향은 만 겹의 봉우리로 막혔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길이 꿈속에 있도다.
한송정 가에는 외로운 보름달이요
경포대 앞에는 한바탕 바람이로다.
모래 위엔 백로가 항상 모였다가 흩어지고
파도 머리엔 고깃배가 각기 동서로 왔다 갔다 하네.
언제나 임영 가는 길을 다시 밟아
비단 색동옷 입고 슬하에서 바느질할까
- 신사임당, 사친 [思親, 어버이를 그리워하다]
바우길 11구간은 경포호를 지나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에서 끝이 났다. 뜨거운 땡볕을 뿌리치며 기념공원이 있는 솔밭에 도착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생가만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주변을 정비하여 제법 큰 공원으로 단장해 놓았다. 허난설헌의 흔적을 좇아 집안을 두루 살폈다. 조선시대에 재주 많은 여인으로 태어난 게 죄였을까? 평탄하지 않은 삶이 그녀의 작품에도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것 같았다.
옛집은 대낮에도 인적 그치고
부엉이 혼자 뽕나무에서 울어라
섬돌 위엔 이끼만 끼어 푸르고
참새만 빈 다락으로 깃들고 있네.
그 옛날 말과 수레 어디로 가고
지금은 겨우 토끼 굴처럼 폐허 되었네.
이제야 선각자 말씀 알겠구려.
부귀는 내가 구할 바 아니라는 것
-허난설헌, [感遇, 느낀 대로 노래한다]
예향(藝鄕)이라고 불리는 강릉.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류문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그녀들이 있어 강릉을 예향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강릉이 예향이어서 그녀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경포호에는 안렴사 박신과 기생 홍장의 사랑이야기도 전해온다.
한송정 달 밝은 밤의 경포대에 물결 잔 제
유신한 백구는 오락가락하건마는
어떻다 우리 왕손은 가고 안이 오느니.
-홍장, 한송정 달 밝은 밤에
아무래도 강릉의 빼어난 풍류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낳는 모양이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초저녁에 향긋한 커피 한 잔 들고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 경포호에서 강릉 여인들에게 시 한 수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