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툰 100년 전쟁. 전쟁터가 된 프랑스는 전국이 초토화되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하얀 갑옷에 하얀 옷을 입은 17살 소녀가 오를레앙에 나타났다. 대천사 미카엘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듣고 참전한 잔 다르크다. 그녀로 인해 영국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었던 프랑스가,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프랑스가 극적으로 영국을 물리치고 열강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그녀의 이름에서 별명을 따온 아류는 있지만 그런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나 신화에서는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 신화에 그런 여인이 있다.
성격은 왈가닥이지만 외모가 빼어나고 지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며 용기까지 갖춘 소녀가 있다.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하늘나라 문곡성(文曲星, 옥황상제라는 주장도 있다)의 아들 문 도령과 결혼했다. 남편이 악당들에게 살해되자 서천 꽃밭(저승에 있는 꽃밭으로 온갖 주술이 작용하는 꽃들이 피어 있는 곳)에서 가져온 소생 꽃으로 살려내고, 수만 명의 적들이 쳐들어오자 남편 대신 대장군이 되어 멸망 꽃으로 적들을 물리친다.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 공으로 그녀는 ‘신’으로 인정받았다.
문 도령을 보고 첫눈에 반한 왈가닥 소녀는 남장하고 같은 방에서 동고동락하며 3년 동안 글공부한다. 어느 날 문 도령이 그녀에게 오줌 멀리 보내기 시합을 제안한다. 그녀는 문 도령 몰래 대나무 대롱을 사타구니 사이에 끼고 오줌 줄기를 더 멀리 보내 버린다. 지혜롭기도 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파이터 기질도 있는 여자다.
3년 공부가 끝나고 문 도령이 하늘나라로 돌아가려 하자 소녀는 자신이 여자임을 밝히고 첫날밤을 지낸다. 문 도령은 결혼을 약속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갔지만 문곡성은 이미 문 도령의 혼처를 정해놓고 있었다. 왈가닥은 포기하지 않고 문곡성을 찾아간다. 문곡성은 며느리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 쉰 자 구덩이에 숯 쉰 섬을 묻어 불을 피워놓고, 그 위에 놓인 뜨거운 칼날을 밟고 건너오라고 한다. 정혼녀는 도전을 포기했지만 소녀는 발뒤꿈치를 살짝 베였을 뿐 무사히 건넌다. 소녀는 베인 자리를 치맛자락으로 가려 문곡성이 못 보게 하고 결혼 승낙을 받는다. (여자들의 월경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강단 있고 재치도 넘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나라를 적으로부터 구해내어 신이 된 소녀는 하늘나라에서 살라는 문곡성의 제안을 뿌리치고 “하늘에 있는 오곡 종자의 씨앗을 인간 세상에 전하고 싶다.”라며 씨앗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온다. 이보다 자기 주관이 더 뚜렷할 수 있을까? 당차고 호불호가 분명한 그녀가 바로 제주 신화에 나오는 농사의 신 ‘자청비’다.
지고지순한 우리의 여성상과는 사뭇 다른, 남자 같은 성격이면서도 지혜롭고 빼어난 미모를 갖춘 완벽한 여인, 자청비(自請妃). 그녀의 이름은 ‘스스로 청해서 태어났다’라고 해서 지어졌다고도 하고, ‘자청하여 비를 부르는 신’이라고 해서 지어졌다고도 한다. 이름이 어디에서 기원했든 그녀가 현명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여인을 신화가 아닌 현실에서 만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