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外天

by 아마도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봄날. 친척 집에 방문했다가 거실 한쪽에 굴러다니는 책을 발견했다. 표지는 물론 앞부분과 뒷부분이 각각 10여 장쯤 떨어져 나갔고, 글씨도 깨알같이 작은 500여 쪽짜리 소설책이었다. 따분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즉시 읽기 시작했다. 몇 쪽 넘어가기도 전에 ‘소림 108 나한진’이니 ‘무당 7검’이니 하는 낯선 단어들이 나타났지만 마른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날, 소설을 읽느라 늦은 밤까지 머물며 친척 집에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책 제목은 물론 저자도 모르는 낯선 책을 통해 처음 만난 무협지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또 다른 무협지를 읽으려고 동네 서점은 물론 종로서적과 같은 대형서점들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무협지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어느 날, 등굣길에 문이 열려있는 만화 가게를 무심히 들여다보다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무협지를 발견했다. 너무나 반가워 하굣길에 두 권을 빌렸다. 순식간에 읽고 나니 그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하굣길에 한 세트를 빌려 밤새워 읽고 등굣길에 반납하곤 했다. 물론 식구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지나치게 공부한다고 걱정했다.


1학년 봄부터 시작한 무협지 탐독은 2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될 때쯤에야 끝났다. 매일 한 세트씩 500여 일 동안 읽어나가다 보니 동네 만화 가게에는 더 빌릴 책이 없어 이웃 동네 만화 가게까지 모두 훑었다. 그렇게 읽은 분량이 수레 5대는 족히 넘을 듯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말한 ‘무릇 남자라면 다섯 수레 분의 책을 읽어야 한다’라는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무협지로 달성한 셈이다. 이쯤 되자 무협지 목차만 보고도 내용을 대강 추측할 정도가 되었고, 가끔은 책 한 권 내볼까 하는 오만함도 생겼다. 요즘 말로 ‘무협지 덕후(御宅,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의 반열에 올랐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미련 없이 무협지와 이별했다.


대학을 마치고 취업해서 한창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만화 가게에서 불량서적처럼 유통되던 무협지가 종로서적에, 교보문고에 나타났다. 무협과 역사가 결합한 김용의 『영웅문』이 800만 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어 화려하게 등장하며 무협지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무협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치 세외 고수(世外高手)가 나타나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는 것을 모르고 알량한 재능으로 천방지축 날뛰었느냐!’라며 일갈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고 했는데 뛰기는커녕 제대로 기지도 못하면서 ‘무협지 덕후’라고 우쭐한 것이다.


서재 한쪽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책들이 보였다. 지인들이 열과 성을 다해 쓴 글을 출판해서 보내 준 책들이다. 책 한 권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드는지 잘 알면서 이렇게 방치해 놓다니…. 자책이 들어 제일 밑에 있는 책부터 집어 들었다. ‘그래 코로나19가 창궐해서 외출도 어려운데 집에서 책 읽으며 소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잘 됐다.’ 싶기도 했다. 지인들이 보내 준 책들은 대부분 수필집이었다. 짧은 글이었지만 처음에는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하긴 그의 삶의 일부를 들여다보는 것인데 쉬울 리가 있나…. 글을 읽어갈수록 탄력이 붙더니 무협지를 처음 대했을 때처럼 술술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무협지보다 더 흥미진진해서 폭염 주의보도, 열대야도 잊은 채 밀려있던 책을 모두 읽었다.

여운이 길게 남았다. 내가 아는 하늘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늘도 아득한데 그 너머에 있는 하늘은 또 어떤 모습일까? 어느 분의 책 속에 ‘수필은 웃으면서 들어가서 울면서 나오는 문학’이라는 표현이 있다. 절절하게 공감이 갔다. 누가 내 뺨 안 때려주나? 핑곗김에 펑펑 울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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