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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Nov 24. 2022

내 눈에는 안 보여도

“당근!” 맑고 아름다운 여인의 매력적인 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핸드폰의 화면을 열었다. 아쉽다. 물건을 사겠다는 전갈 대신 ‘찜’했다는 알림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까지 수십 명이 그랬듯이 ‘찜’만 할 뿐 구매하겠다는 제안은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찜 쪄먹는 물건을 파는 것도 아닌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판매 취소’를 누를까 하는 충동도 생겼다. ‘당근!’을 외치는 여자 목소리가 예뻐 물건도 금방 팔릴 줄 알았는데…. 핸드폰은 내려놓고 아쉬움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 지도 여러 달이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한 듯했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장롱 가득 들어있는 옷가지들, 이부자리들 그리고 부엌살림 등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가짓수가 만만치가 않았다. 부여에서 서울로 이사하며 허튼 것들은 대부분 버렸다. 이제 남은 물건들은 어머니의 손때가 많이 묻은 것들 뿐이어서 정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지니고 있으려니 부피가 컸고, 처분하려니 마음이 가질 않았다. 매일 옷장을 열어보고, 찬장을 뒤져 보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생각했다.

가장 마음이 쓰인 것은 자개농이었다. 50여 년 전 살림살이가 조금 펴자 장롱부터 마련하겠다며 친구들과 유명하다는 자개 장인들을 찾아다닌 끝에 큰돈을 들여 산 것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닦고, 쓰다듬으며 정성을 들인 어머니의 분신 같은 존재였다. 이런 장롱을 대형폐기물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내가 그것을 더는 볼 수 없을지라도 어딘가에서 살아 있기를 바랐다. 자개 농방을 방문하여 사진을 보여주니 시큰둥한 반응이 나왔다.


몇 곳의 농방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후 장롱, 장식장, 문갑, 화장대로 세분해서 ‘당근 마켓’과 ‘번개장터’에 판매 물품으로 등록했다. 수없이 많은 자개장롱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머니의 자개농도 팔릴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과연 그곳에서 새로운 주인을, 아껴줄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찜’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찜하는 숫자는 늘었지만 문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다가는 새 주인 찾기에 실패할 것만 같아 ‘대형폐기물로 처리해야 하나?’ 하는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갑이 가장 먼저 팔렸다. 트럭에 문갑을 실어 보내고 나니 마음이 착잡하고 눈앞이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릿했다. 시원섭섭함은 ‘다시 봐도 너무 맘에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풍경이 수놓아져 있어요.’라는 문자를 받으면서 누그러졌다. 두 번째로는 화장대가, 세 번째는 장식장이 팔렸다. 장식장을 산 사람은 최근 한옥을 지었는데 그곳에 어울리는 장식장을 찾았다며 ‘좋은 물건을 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잘 간직하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져 ‘이제야 장식장이 제대로 주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아껴주십시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장롱은 끝내 새 주인을 찾지 못해 대형폐기물로 처리했다. 다른 자개장들과 수십 년을 형제자매처럼 붙어 지내다가 뿔뿔이 흩어진 것도 안타까운데 생까지 마감한 것이다.


일부 물건들은 아껴줄 새 주인을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아름다운 가게’로 보냈다. 이웃 주민들에게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잠시라도 어머니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마침내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이 모두 떠났다. 새 주인을 만나 제 역할을 하고 사랑받고 있겠지? 그런데 그 물건들을 사랑했던 어머니의 머리에는, 마음에는 녀석들이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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