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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May 31. 2023

가방 속이 궁금해

할슈타트를 떠나 그라츠로 가는 날.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는 통보가 왔다. 할슈타트를 포함한 일부 구간의 철로 정기보수 때문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 철도청은 열차를 탈 수 있는 곳까지 대체 버스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할슈타트의 오베르트라운에서 그라츠까지 편안하게 열차로 이동하려던 계획이 망가졌다. 오베르트라운에서 바트 고이제른까지 30분간 버스로 이동한 다음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 다음 슈타이나 이르드닝까지 50분 동안 버스로 간 다음 다시 2시간을 기다렸다가 그라츠행 열차로 갈아타는 복잡한 여정으로 바뀐 것이다. 여정이 바뀌면서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흥분도 들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 그게 바로 여행 아니던가?


버스에 올랐다.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니 한국인 모녀로 보이는 사람들이 커다란 가방을 하나씩 어깨에 메고, 자기 키만큼 큰 캐리어를 하나씩 밀면서 버스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들은 커다란 캐리어를 버스에 올리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곱게 화장한 얼굴이 순식간에 땀범벅이 되었다. 승객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버스에 오른 모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내 옆쪽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엄마는 맥이 풀린 사람 같았다. “엄마하고 같이 여행하나 봐요? 며칠간 여행해요?” 모녀의 가방이 워낙 커서 꽤 오래 여행하는 것 같아 내가 딸에게 묻자 그녀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8박 10일요. 두 분은요?” 갑자기 들린 한국말에 놀라면서도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한 달간요.” 내 대답에 모녀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이곳 음식이 맞으세요?” 속사포 같은 질문에 “우리는 이곳 음식을 잘 먹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딸은 몹시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엄마는 낯선 음식을 잘 못 드세요. 그래서 햇반하고 컵라면을 잔뜩 가져왔는데 그것도 다 떨어져서 걱정이에요.” 모녀가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다니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됐다.

할슈타트 호수 남쪽 오베르트라운

모녀와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버스가 바트 고이제른 역에 도착했다. 모녀는 빈으로 간다며 플랫폼으로 향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멀리서 딸이 캐리어를 기차에 실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제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모녀의 가방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열차에 오른 그녀는 좌석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갑자기 억센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외국인 부부가 한국인 모녀를 보며 웃는 소리였다. 그는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주체도 못 하는 큰 가방을 들고 다니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에요. 사실 우리 가방은 너무 작고 당신들 가방이 딱 좋은 크깁니다.” 우리는 기내용 중형 크기의 캐리어를 하나씩 들고 있는데 그들의 캐리어는 우리 것의 절반쯤 됐다. 그들은 멕시코인이었다. 두바이에서 여행을 시작하여, 수에즈 운하를 지나 터키, 이탈리아를 거쳐 할슈타트에 왔다고 했다. 그들은 그라츠를 지나 북유럽까지 총 90일 동안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행 기간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보이는 그들의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슈타이나 이르드닝 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과 한국 여행지와 멕시코 여행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르드닝 역에서 열차 시간이 서로 달라 헤어지면서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라츠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가방에 눈길이 갔다.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남의 가방 크기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멕시코인 부부가 남겨준 선물인 모양이다. 같은 열차 칸에서 한국인 모녀의 가방만큼 커다란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가방보다 큰 것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내가 타고 갈 항공사 체크인카운터 앞에는 한국 사람들로 꽉 찼다. 대부분 단체여행을 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대부분 오베르트라운에서 만난 모녀처럼 커다란 가방을 지니고 있었다. 단체 여행이라면 열흘 남짓이었을 텐데 저만한 가방이 필요했을까? 궁금했다. 저들의 가방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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