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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난 Aug 03. 2023

베란다에 갇혔어요

‘극한 장마’가 물러가더니 무더위가 시작됐다. 이른 아침에 산책하고 돌아와도 물에 빠진 사람처럼 땀으로 흥건한데 무더위 속이니 오죽할까? 들고나간 생수를 땀으로 바꾸어 집으로 돌아오니 아무도 없다. 땀에 젖은 옷을 다른 옷과 함께 세탁한 뒤 빨래를 널려고 베란다로 나갔다. 빨래가 많지 않아 금방 널었지만 그새 몸에는 땀이 흥건했다. ‘샤워를 또 해야 하나?’하고 구시렁거리며 문을 열려고 하니 꼼짝도 안 한다. 베란다로 나가면서 무심코 닫은 문이 잠긴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핸드폰을 안에 두고 팬티와 러닝만 입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베란다는 한여름 태양의 뜨거운 열기로 채워졌다. 햇빛을 피할 곳은커녕 온실과도 같은 베란다에 있으려니 땀이 줄줄 흘렀다. 이러다간 탈진할 것 같아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려고 베란다 밖을 내려봤다.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를 향해 ‘여보세요!’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못 들었는지 그냥 지나갔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옆에 이삿짐을 나르는 화물 사다리가 설치되더니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무리 악을 써도 기계음 묻혀버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갈증이 들었다. 팬티와 러닝도 축축해졌다. 탈수 증상이 오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마침 긴 손잡이가 달린 걸레가 보였다. 걸레를 거꾸로 잡고 창밖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옆집 창문을 두들겼다. 아무 반응이 없다. 아랫집 창문을 두드렸다. 역시 반응이 없다. 아이들은 학원에, 부부는 각자의 일터에 가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여름휴가를 떠났나? 어쩔 수 없이 무더위와 싸우며 가족이 귀가하는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답답하고 불안했다.


베란다 한쪽에 망연히 주저앉았더니 ‘팬티와 러닝만 입은 사내 베란다에서 실신한 채로 발견!’이라는 신문 기사가 상상 속에 떠올랐다. 정말 그게 현실이 된다면 이 얼마나 창피스러운 차림이겠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베란다를 살피다 화분에 눈이 갔다. 아주 넓지는 않아도 글자를 써넣을 만한 이파리가 달린 작은 나무가 심어진 화분이다. 잎을 하나 땄다. 공간이 좁으니 호수와 현관 비밀번호만 적을 셈이었다. 맙소사! 필기도구가 없었다. 혈서를 쓰려니 손가락을 물어뜯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갈증은 점점 심해지는 데 도움을 청할 방법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베란다를 살폈다. 화분에 식물 이름을 적은 작은 나무 팻말(?)이 꽂혀 있었다. 뽑아보니 끝이 뾰족했다. 이파리 위에 호수와 비밀번호를 새겼다. 문제는 10층에서 1층에 있는 사람에게 전할 방법이었다. 그냥 던지면 바람에 날릴 게 뻔하니 1층에 무사히 떨어뜨릴 방법이 필요했다. 다시 한번 베란다를 살피다 식물의 줄기를 받쳐주는 철사가 화분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파리를 철사의 중간에 꿰고 사람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더니 문득 아파트 경비가 나타났다. 이삿짐을 살피러 나온 모양이다. 그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나를 향해 올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철사를 흔들어 보이며 ‘제발 나뭇잎에 쓰인 글씨를 읽어다오.’ 하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던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뭇잎은 버리고 철사만 만지작거렸다. 나뭇잎에 쓰인 글씨를 읽어달라고 고함을 쳤지만, 그는 안 들린다는 손짓을 하며 사라져 버렸다. ‘이런! XX’.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나타났다. 여전히 이삿짐을 살펴보려는 것 같았다. 나뭇잎에 호수와 비밀번호를 적고 베란다 한쪽에 굴러다니던 비닐에 싼 다음 옷걸이에 꿰어 그에게 다시 던졌다. 다행히 이번에는 나뭇잎을 살펴보더니 사라져 버렸다. ‘제발… 올라와 주시오.’ 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입구에 서서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내 앞으로 오라고 필사적으로 몸짓을 했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새시문을 가리키며 열라고 손짓, 발짓하자 비로소 상황을 눈치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실내로 들어서는 내게 그는 옷걸이를 내밀었다. 나뭇잎을 꿰려고 휘어놓은 것까지 반듯하게 펴서…. 그는 황당해서 웃고 나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웃었다. 이날, 그와 나는 다시 겪지 못할 사건의 목격자와 주인공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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