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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공간

by 아마도난

‘꽃의 정원’이라는 본래 이름보다 ‘물의 궁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따만 사리(Taman Sari). 크라톤 왕궁에서 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왕과 왕족의 휴식을 위해 지어진 별궁이었다. 위급 시에는 요새로도 쓸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술탄 하멩쿠부워노 1세는 1758년 포르투갈과 자바 양식을 혼합하여 10헥타르(약 3만 평)의 부지에 수영장, 인공호수, 섬, 지하통로 및 수로 등을 건설하였다. 이곳에서 만난 자원봉사자는 크라톤 왕궁과 따만 사리가 지하수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술탄은 카누를 타고 이동했다고 한다. 이 수로는 1867년 므라피 화산 폭발 때 파손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고 한다.

따만 사리의 아치형 입구를 들어서면 정사각형 모양의 수영장 2개가 나타난다. 수영장 왼쪽에는 3층 건물이, 오른쪽에는 단층 건물이 있고 3층 건물 뒤편에도 정사각형 모양의 술탄 전용 수영장이 있다. 이곳은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알함브라가,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나무와 분수로 단장하여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헤네랄리페가 떠올랐다. 아니,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이슬람 양식이 곳곳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진 따만 사리가 헤네랄리페보다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만 사리와 알함브라

술탄은 건물 3층에서 창살 사이로 수영하는 후궁들을 지켜보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보이면 꽃을 던졌다고 한다. 혹자는 술탄이 꽃을 수영장에 던지면 후궁들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지고, 맨 먼저 꽃을 잡은 여인이 침실에 들었다고도 한다. 따만 사리, ‘꽃의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배경이 이런 일화 때문일까? 선택된 여인은 3층 건물 맞은편에 있는 단층 건물에서 곱게 단장하고 왕의 침실로 향했다. 후궁들이 몸을 단장했다는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그때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녀들은 행복했을까?

건물 안에서 젊은 인도네시아 여자를 만났다. 따만 사리에 살았을 어떤 후궁들보다 더 예뻤을 것 같은 그녀는 서툴기는 해도 한국어를 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며 배웠단다. 그녀는 내 물음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고, 한국어로 표현이 안 되면 온갖 몸동작으로라도 알려주려 했다.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농담조로 나를 따라 한국에 가겠느냐고 묻자 기꺼이 따라가겠다며 우스갯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 설명이 고마워서 준비해 간 책갈피를 선물로 주었다. 우리나라 전통 복장을 한 신랑, 신부의 모습이었는데 그녀는 연신 ‘예쁘다’를 반복하며 좋아했다.


따만 사리는 므라피 화산 폭발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고 수영장 등 일부만 남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폐허가 된 따만 사리 주변에는 무허가 주택이 미로 같은 골목을 따라 난립해 있다. 마치 복잡한 실내 구조를 가진 이스탄불의 하렘처럼. 하렘은 술탄이나 거세된 남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여인들의 공간이다. 따만 사리도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 삶을 던져야만 하는 여인들의 공간이었다. 이들에게 화려한 장식과 조경이 무슨 위로가 됐을까? 알함브라의 헤네랄리페보다 더 아름다운 따만 사리에서 한 남자만 바라보며 살았을 여인들의 운명이 안쓰럽게 다가왔다.

따만 사리 주변과 하렘 내부

따만 사리나 하렘을 의자왕이 알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궁녀를 삼천 명이나 거느렸다던 의자왕도 이렇게 멋진 공간을 마련했을까? 그보다는 부당하게 폄훼되었다고 화를 냈을까? 술탄에게 질투가 나서 그랬는지 후궁들이 안쓰러워 그랬는지 내가 호출한 장소를 찾지 못해 늦게 도착한 그랩 기사에게 공연히 심술을 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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